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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 詩]창신동/금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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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은 비가 와도 언제나 바짝 말라 있다

사람의 발자국이 어쩌다 골목에 박히지만

비가 내리는 날이면 여지없이 사라지고 만다

완제품을 실어 나르는 오토바이 바퀴 자국

가파른 골목에 미싱 소리 요란하다

서울에서 이태리까지 열 번을 달릴 수 있는

실타래비가 내린다

남산타워가 지척이고

광화문의 촛불이 손끝에서 뜨겁게 달아올라도

토요일 하늘을 등진 여자의 발바닥에 달린 미싱 페달 위로

바늘비가 내린다

슈퍼에서 사 온 과자 봉지가 들썩거리고

낙산공원의 가로등 불빛이 자정을 재촉하는

슬리퍼비가 내린다

염색 오천 원 파머 이만 오천 원이 무색한 텅 빈 미장원

형형색색의 매니큐어를 칠하고 있는 원장의 앞치마에

머리카락비가 내린다

공장 문짝에 너덜너덜 붙어 있는

방 두 칸에 보증금 이천만 원 월 오십오만 원 전단지

구찌 와끼 마도메 시야게 간판 속으로 파고드는

뽕짝비가 내린다

미싱 바늘구멍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페달을 밟을 수 있는

창신동 골목길

늙은 여자가 내린다


[오후 한 詩]창신동/금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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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열일곱 살이었다고 한다. 열일곱 살 때 버스를 탔다고 한다. 경북 영천에서 아니면 전남 여수에서 혹은 강원도 황지에서 무작정 버스를 타고 서울로 창신동으로 올라온 그때가 열일곱 살이었다고 한다.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먼저 고향을 떠난 친구를 따라 창신동 골목길로 처음 들어서던 게 개나리가 피던 때였는지 접시꽃이 지던 때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은 희한하게도 비가 내리는데 낮달이 떠 있었다고 한다. 38년 전 열일곱 살 때 정말 그랬다고 한다. 쨍쨍한 여름 한낮에도 크리스마스이브 밤에도 미싱 바늘이 손톱을 박던 새벽에도 비는 내렸고 낮달은 떠 있었다고 한다. 38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그랬다고 한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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