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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 詩]밤의 벌레들/황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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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켜자마자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는 벌레들이 있습니다

자, 한번 생각해 봅시다

당신이 불을 켜기 전 벌레들이 담겨 있던 어둠은

얼마나 아늑하고 그윽한 것이었겠습니까?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는 벌레들을 미안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그러나 말이 통하지 않아 사과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해하며 자, 한번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당신이 불을 켜기 전 벌레들은 얼마나 천천히

얼마나 우아하게 이 욕실 바닥 위를 기어 다니고 있었겠습니까?

그 바닥에 자신들을 해할 것은 아무래도

없을 거라는 생각에 안도하며

세상 편안한 마음으로 스멀스멀 기어 다니고 있었을 거라

이 말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당신이 불을 켜자마자

갑자기 없던 혼이라도 생겼다 빠져나간 듯

그렇게 급조된 영혼이 황급히 빠져나가는 통에 미처 그 영혼과

인사도 못 하고 병신이 돼 버린 벌레들이

발발발 여기저기 흩어지는 걸 죄지은 마음으로 바라보며

자,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봅시다

당신이 불을 켜기 전 벌레들을 뒤에서

옆에서 앞에서

감싸고 있던 그

그윽한 고독과 어둠을

그 어둠의 우월함에 대해 한번 말입니다

생각만 해도 사방에서 당장 밀어닥칠 듯한

그 물 샐 틈 없는 어둠 속 고독……

당신은 거실에서 혼자 눈 감고 음악을 듣고 있었는데

퇴근 시간이 훨씬 넘어서까지 밥도 못 먹고 일한 당신은

마침내 집에 도착해 깨끗한 빈속에 깨끗한 음악을 채워 넣고 있던 참인데

갑자기 유리창에 커다란 짱돌이 날아와 그 정적을 한순간에 모두

깨뜨려 놓고

그 틈으로 찬바람이 숭숭 새어 들어오는 겁니다

완벽히 고여 있던 음악은 깨진 창 틈새로 술술

빠져나가고

당신은 갑자기 어쩔 줄 몰라 하며

사라지는 음악을 두 손으로 움켜잡아 보지만

그 음악은 이미 찬바람의 손에 잡혀 갈가리

찢겨진 후……

자,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깊이 공감해 봅시다

당신에게는 깊은 공감 능력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벌레 같은'이라는 관용구를 그 뜻도 모르면서 아무렇게나 사용하는 당신

자, 마침내 화장실 변기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는 당신

준비는 완벽합니다 준비라고 따로 할 게 없군요

그러니 한번 두 눈을 감고

이미 다 사라져 버린 벌레들을 마음속으로 뒤쫓아가

그 단단한 껍질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벌레가 되어

벌레의 절망감을 조금이나마 나눠 가져 봅시다

벌레의 내장 깊은 곳에 아직 조금은 남아 있을 어둠을 찾아

그 속에 들어앉아

아직 채 가라앉지 못한 떨림 속에서

아까 듣던 그 음악을

계속

이어서 들어 봅시다



[오후 한 詩]밤의 벌레들/황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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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그렇지 않은가. 한번 생각해 보라. 우리가 "불을 켜기 전 벌레들"이 "얼마나 천천히" "얼마나 우아하게" 또한 아무런 걱정 없이 평화롭게 욕실 바닥 위를 기어 다니고 있었을지에 대해 말이다. 벌레들에게 우리는 다만 낯설고 두려운 침입자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 벌레들의 평온한 밤을 무참히 짓밟곤 하는 파괴자라고 말하는 게 오히려 더 적확할 것이다. 물론 이는 우리가 뜻하지 않은 바라고 변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이지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이미 벌레들은 그리고 이 지구는,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그 누군가는 다만 우리의 편리와 안온을 위해 쫓겨나고 희생당했으니 말이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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