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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열의 體讀]조국에서도 역사에서도 잊힌 사람들, 오키나와의 조선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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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딸깍발이]오키나와와 조선의 틈새에서 서평
1945년 8월20일 현지 군부대의 학살
생후 수개월 갓난아이에게도 몹쓸 짓
오키나와 전쟁 '일본의 적' 된 조선인
美에 정보 넘긴 스파이혐의 씌워 만행
당시 부대장 "양심의 가책 없다" 발언

일본 오키나와 기노완시에 위치한 사키마 미술관에서 1945년 오키나와 전투의 참상과 일본군의 만행을 표현한 오키나와전도(戰圖, 마루키 이리·마루키 토시 作)을 관람객이 바라보고 있다.<이미지출처:연합뉴스>

일본 오키나와 기노완시에 위치한 사키마 미술관에서 1945년 오키나와 전투의 참상과 일본군의 만행을 표현한 오키나와전도(戰圖, 마루키 이리·마루키 토시 作)을 관람객이 바라보고 있다.<이미지출처: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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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최대열 기자] 구중회. 19세기 말 부산에서 태어나 이후 오키나와로 넘어간 조선인이다. '제국' 일본의 끝무렵인 1945년 오키나와를 배경으로 미군ㆍ일본군 간의 전면전(오키나와전쟁 혹은 전투)이 발발했고, 다니카와 노보루라는 일본 이름으로 살던 구씨는 전쟁 후 오키나와 본섬에서 서쪽 100㎞가량 떨어진 구메섬으로 넘어갔다. 구씨와 그의 일본인 아내, 그리고 생후 수개월로 추정되는 아이를 포함한 다섯 자녀는 일본이 무조건적인 항복을 선언하고도 며칠이 지난 1945년 8월 20일 현지 군부대에 의해 학살당했다.


이날은 장남 가즈오의 생일이었고 한데 모여 축하하던 도중 현장에서 차례로 목숨을 잃었다. 구씨는 목에 줄을 매달아 해안으로 끌려가던 중 숨졌고 다른 가족들도 칼에 찔리거나 난도질당했다. 스파이 혐의와 조선인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구씨 가족은 냄비ㆍ솥을 수리하거나 일용잡화를 팔면서 생계를 꾸렸는데, 당시 일본군은 잡화행상으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닌 구씨를 미군에 정보를 넘긴 스파이라고 봤다. 일본군은 미군의 오키나와 상륙을 대비해 주민까지 마구잡이로 군대로 불러들였고 이에 군민(軍民)이 섞이면서 일반 주민 사이에서도 군사기밀이 쉽게 알려지곤 했다. 구씨 가족 학살 이틀 전에는 현지인이 미군의 상륙을 도운 실제 스파이 행위가 적발되기도 했다.

그러나 구씨와 그의 가족이 스파이라는 명백한 증거는 없었다. 당시 구메섬의 부대장으로 있던 가야마 다다시 병조장은 훗날 스파이로 간주해 처형한 근거를 묻는 질문에 "각 부대라든가 마을이라든가 경방단으로부터 들어온 정보를 종합해 처형했다"면서 "섬사람들로부터 이 사람은 어떻다, 저 사람은 어떻다는 식의 정보가 있었으며 그 정보가 주요했다"고 말했다.


오키나와의 '한의 비'(사진 왼쪽부터), 야카 수용소, 오키나와전쟁 후 학살당한 구중회씨의 가족<출판사 제공>

오키나와의 '한의 비'(사진 왼쪽부터), 야카 수용소, 오키나와전쟁 후 학살당한 구중회씨의 가족<출판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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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씨 가족의 죽음은 오키나와전쟁 전후를 살아간 조선인의 처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가운데 타자화된 공공의 적이 필요했고 조선인은 제1 타깃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최근 국내에 출간된 '오키나와와 조선의 틈새에서'를 쓴 오세종 류큐대 인문사회학부 준교수는 "놀라운 것은 구씨를 스파이로 지목한 이가 다름 아닌 섬 주민이라는 사실"이라며 "주민의 밀고행위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식민지주의 질서, 즉 조선인을 자신들보다 하위에 자리매김하고 더 나아가 폭력을 정당화하는 구조에 주민 또한 포획돼 있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구씨 가족을 비롯해 스파이 혐의로 살해당한 이가 20여명, 자살ㆍ기아로 내몰린 이를 포함하면 70명에 달했다. 1960년대 들어 과거 만행을 되돌아보는 기록운동이 불거졌고 이후 오키나와 일대 류큐가 미국 통치에서 일본으로 넘어가던 1970년대 초반까지 일본 본토까지 담론이 형성됐다. 가야마는 당시 언론인터뷰 등에서 "일본군 최고 지휘관으로 당시 처벌에 문제가 있었다고 조금도 생각지 않는다" "나쁜 짓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기에 양심의 가책이 없다" 등의 발언을 쏟아냈다. 당시 처형을 집행했던 이는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며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이 같은 태도는 전후 일본의 위정자를 중심으로 현재까지도 비슷하게 나타나는 패턴인데, 과거에 대한 청산이 지지부진했기 때문에 가능한 양태이다.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던 건 다양한 원인이 있을 테지만 동아시아 지역을 지렛대로 삼아 세계 패권에 대한 야욕을 숨기지 않았던 미국, 특히 중대한 정치적 결정이 가능했던 최고위층 정치집단이나 군산복합체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영향이 가장 크다고 나는 본다. 저자는 "동아시아에서 반공체재를 구축하기 위해 '한일 양국은 과거를 잊고 긴밀히 협력해야 한다'고 이승만은 말했지만 결과적으로 한국은 과거 식민 지배를 포기하고 협력을 선택했다"면서 "미국의 동아시아에서의 패권은 역사와 기억을 억압을 통해 성립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이승만 정부서도 관심 밖의 사람들
1960년대 교민회 설치 요구 등 무관심
오세종 류큐대 교수 발로 되살린 역사


이후 체결된 한일조약에서도 드러나듯 재일 조선인이 맞닥뜨린 환경과 불평등은 애당초 우리 정부에겐 큰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소수이자 시야 밖에 있는 재(在) 오키나와 조선인은 말할 것도 없었다. 저자는 전후 일본 사회에서 외국인과 관련한 법ㆍ제도를 마련하는 과정, 나아가 한국 등 주변국의 상황에 따라 시시각각 바뀌는 국제정세 등을 시간 혹은 사건 별로 서술하면서 어떻게 오키나와의 조선인이 '불가시화'된 존재로 규정됐는지를 되짚는다.


한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조선적(朝鮮籍) 재일 조선인 역시 일본 내에서 크고 작은 불평등을 겪고 일부 혐한 시위대가 주로 겨냥하는 대상이나, 오키나와는 1972년 복귀 이전까지는 일본도 아니었던 탓에 그곳의 조선인은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끼인 존재였다. 틀림없이 과거에 실존했지만 어느 순간 증발해 행방이 묘연해진, 아울러 한동안 관심조차 받지 못해 디아스포라 지위조차 얻지 못했던 셈이다. 신문기사 등을 통해 과거 오키나와에 징용됐던 이들의 증언이 1960년대 후반 국내에 알려지자 그들은 한국 정부에 "교민회를 만들기 위해 관여해 달라" "교포실태를 조사하고 한국 국민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서류를 발급해 달라" "모국을 모르는 2세들의 교육대책을 마련해달라" 같은 '기초적인' 요구를 했다. 이는 거꾸로 한일조약 이후에도 한국 정부가 오키나와에는 전혀 관심 갖지 않았다는 일이라고 저자는 지적했다.


저자는 사료가 좀처럼 발견되지 않아 책을 쓰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오키나와현사와 각 지역 단위의 사료, 현지와 한국의 신문자료를 인용해 집필했다. 20세기 중반 이후 오키나와를 비롯한 동아시아 일대 절대적 영향력을 끼친 미군이나 현지 경찰의 자료를 종합적으로 참고해 분석하고 싶었으나 현실적인 제약이 있었다고 한다. 책 뒷부분에는 저자가 오키나와 현지에 과거부터 최근까지 조성된 비와 탑을 직접 살펴보며 우리가 어떻게 그들을 기억하고 있는지를 살피고 있다. 산발적으로 희미하게 남아있는 역사적 사실을 꿰어내 애써 누군가는 외면하고 싶어 했던 존재를 되살리려는 시도만으로도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책에서 비중 있게 다루고 있는 오키나와의 조선인 위안부 문제나 베트남전을 겪으며 반대로 가해자가 돼야만 했던 오키나와의 처지, 1970년대 이후 불거진 복원운동 등도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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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열 기자 dychoi@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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