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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지은 기자]쾌도난마(快刀亂麻)는 '잘 드는 칼로 얽히고설킨 삼베를 단번에 자른다'는 뜻이다. 알렉산더 대왕이 고르디우스의 매듭(Gordian Knot)을 단칼에 잘라버린 일화와도 일맥상통하는 사자성어다. 복잡한 문제를 단 한번에 풀어버리는 묘수에 대한 열망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존재했던 모양이다.


지난 3일 시화공단의 중소기업 현장을 방문한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입에서도 쾌도난마라는 단어가 나왔다. 중소기업인들의 현장 애로를 경청한 그는 "마음이 답답하다. 경제 문제뿐만 아니라 구조적 문제다. 기자들이 옆에 있어 적나라하게 말씀드리기는 힘들지만, 쾌도난마처럼 해결할 묘안이 있을까. 한번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하기 쉽지 않다. 노력을 더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기자들이 있어 적나라하게 말하지는 않겠다고 했지만, 김 부총리의 책을 읽어본 사람으로서는 충분히 적나라한 자기고백처럼 느껴졌다. 그는 지난 5월 출간한 저서 '있는 자리 흩트리기'에서 '킹핀(kingpin)'을 언급한 바 있다. 킹핀이란 10개의 볼링핀 중 가운데에 숨어 있는 5번 핀으로, 이 핀을 제대로 공략하면 10개의 핀을 모두 쓰러트려 스트라이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킹핀으로 불린다.


김 부총리는 1번 핀을 저성장, 2번 핀을 청년실업, 3번 핀을 저출산으로 가정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킹핀을 먼저 공략해야 한다"고 설명한 적이 있다. 킹핀을 제대로 맞추면 저성장과 청년실업, 저출산 등의 문제가 다 해결된다는 뜻이다. 그런 면에서, 킹핀은 쾌도난마나 고르디우스의 매듭과 크게 다르지 않다.

처음 내정됐을 때만 해도 기자들과 만나 '킹핀론'을 설파했던 그가 임명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이런 속내를 털어놓는 것은 꽤 의미심장했다. 그만큼 정책적 환경이 녹록지 않다는 뜻으로 읽힌다. 취임 후 첫 추가경정예산(추경)안은 나온 지 한 달 가까이 국회에서 공전했고, 경유세는 관련 공청회를 열기도 전에 '제2의 담뱃세' 논란이 터져나왔다.


기재부는 '증세 여력은 있지만 당장 증세는 하지 않겠다'는 다소 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구상한 공약들을 모두 시행하려면 결국 증세가 필요하지만 그 누구도 시원하게 증세를 입에 올리지 못하고 있다. 증세는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어떤 이유로든 세금을 올리는 것에 반대한다. 그러면서 더 많은 복지 수준을 원하는 것이 이중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엄연한 민심이다. 참여정부를 뿌리부터 뒤흔든 것도 결국 세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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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부총리가 제시한 킹핀론이 멋지지만 공허해 보이는 것도 바로 이런 부분에서다. 정책의 목적이 아무리 합리적이라 할지라도 그 정책과 관련된 국민정서나 현실과 유리되는 순간 논란의 대상이 되어 정권에까지 타격을 준다.


스포츠는 승패가 뚜렷하다. 룰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킹핀도 명확한 룰이 있는 단순한 세계이기에 가능한 개념이다. 반면 현실은 영원한 규칙도 없고 승패도 뚜렷하게 갈리지 않는다. 저성장, 고령화 등 기재부가 쓰러뜨려야 할 핀들은 한 번 공을 맞추는 것만으로는 좀처럼 쓰러지지 않는 구조적 문제다. 킹핀과 같은 묘안을 발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이해관계자간의 조율과 공감대가 문제를 실제로 푸는 열쇠가 아닌가 한다.


이지은 기자 leez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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