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전쟁은 1337년부터 1453년까지 영국과 프랑스가 벌인 전쟁이다. 프랑스의 왕위 계승 문제, 플랑드르 지역의 양모 산업과 관련한 이권 문제가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전쟁 초기에는 선제공격을 한 영국이 우세했다. 그러나 1492년 오를레앙의 성녀 잔다르크의 헌신에 힘입어 프랑스가 전세를 뒤집었다. 전쟁은 프랑스군이 영국군의 본거지인 보르도를 점령한 1453년에 결판이 났다. 전쟁의 결과 농토가 황폐화하고 기사 세력이 몰락, 봉건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절대왕정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농노가 해방되고 부르주아가 등장했으니 유럽사에 미친 영향이 크다.(정미선)
10년을 거듭한 전쟁이니 어찌 신화와 전설이 없겠는가. 전쟁 초기인 1347년, 영국군의 공격에 맞서 11개월이나 사투를 벌인 프랑스 칼레의 시민들이 항복했다.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칼레 시민들을 몰살시키기로 했다. 칼레 시의 대표는 에드워드 3세에게 자비를 청했다. 왕은 조건을 걸었다. 칼레 시의 유지 여섯 명이 목에 밧줄을 걸고 맨발로 영국군 진영에 가 도시의 열쇠를 건넨 뒤 죽어야 했다. 거부(巨富) 유스타슈 드 생 피에르가 가장 먼저 자원했다. 그러자 부유하고 존경받던 시민들이 다투어 나섰다. 모두 일곱이었는데 한 사람이 빠져야 하니 이튿날 아침 가장 늦게 오는 사람을 빼기로 결정했다.
다음 날 여섯 명이 모였으나 생 피에르만 나오지 않았다.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죽음을 청한 이들이 용기를 지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목숨을 끊은 것이다. 이들이 처형되려는 순간, 에드워드 3세는 임신 소식을 알리며 자비를 베풀라는 왕비의 편지를 받는다. 희생은 생 피에르 한 명으로 족했다. 500년이 훨씬 지난 뒤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이 역사에 남을 걸작을 남긴다. 1893년 6월 3일에 제막한 '칼레의 시민(Les Bourgeois de Calais)'이다. 1914년 독일의 극작가 게오르크 카이저는 로댕의 '칼레의 시민'을 보고 영감을 얻어, 이 조각상에 담긴 이야기를 희곡으로 발표하였다.
영국이 진 전쟁이지만 초기엔 좋았다. 북프랑스 아쟁쿠르에서 벌어진 전투는 역사에 길이 남을 제스처 하나를 남겼다. 노르망디에 상륙해 칼레로 북상한 영국군 약 6000명과 프랑스군 2만여 명이 격돌했다. 프랑스군은 기병대가 주력이었고 영국군은 보병 중심이었다. 영국군은 궁노수(弓弩手)들이 프랑스 기병을 쏘아 말에서 떨어뜨리고 보병이 돌격함으로써 승부를 갈랐다. 프랑스군의 전사자와 포로가 7000명에 이르렀다. 프랑스 기사들은 영국군 궁노수들이 미워 "잡히기만 하면 (화살을 쏘는) 검지와 중지를 잘라 버리겠다"고 이를 갈았다. 그러나 도리어 포로가 된 그들에게 영국군은 두 손가락을 내두르며 조롱했다. "어디 잘라가 봐라. 이 프랑스 돼지들아." 그래서 검지와 중지로 V자를 만든 뒤 손등을 보이는 행동이 '쌍욕'이 됐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 때 영국의 총리 윈스턴 처칠은 상대에게 손바닥이 보이도록 검지와 중지를 들어 '승리의 V'를 그렸다. 승리의 V는 대영제국의 자존심과 패기, 영국인들의 용기와 단결을 함축한다. 아무튼 손가락 V는 영국이 원조다.
허진석 문화스포츠 부국장 huh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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