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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그 후]보훈처와 효녀연합 그리고 '애국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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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효녀연합 홍승희씨. 사진=연합뉴스

대한민국 효녀연합 홍승희씨.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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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김봉수 기자]요즘 최대 화제가 되고 있는 '대한민국 효녀연합' 홍승희(26)씨의 미소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니들이 일제 시대를 알아, 6ㆍ25를 알아?"라며 험한 말을 내뱉는 노인들 앞에서 피켓만 든 채 아무 말없이 밝게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선 '관세음보살'의 미소가 느껴졌습니다. 살벌하게 갈등ㆍ대립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분열을 치유하기 위해 나타난 한국판 테레사 수녀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렇잖아도 우리 사회에는 좌ㆍ우를 막론하고 이념ㆍ정치적 생각이 다르다고 서로 죽일 듯 노려보며 때론 폭력 행사도 서슴치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요즘엔 엄마부대ㆍ어버이연합, 심지어 '제2의 서북청년단' 등 극우 성향의 단체들이 꼭 약방의 감초마냥 이런 저런 사안에 끼어들어 살벌한 분위기가 연출되는 일이 다반사죠. 이들이 나타나면 건강한 문제 제기나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의 하소연,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요집회 마저도 모두 '종북', '좌빨'들의 반국가적 행위로 변하고 맙니다. 소위 진보, 좌파 성향의 시민들 중에서도 이들의 조롱ㆍ비난에 발끈해 맞서면서 못지 않은 폭력성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죠.
그러다 보니 서로 침을 뱉고 멱살잡이를 하고, 심지어 몸싸움과 주먹다짐을 합니다. 양쪽에서 같은 장소에서 집회를 동시에 개최하는 날엔 경찰들만 죽어납니다. 서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격리해야 하는데, 꼭 화를 불같이 내면서 다가가서 폭력을 행사하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대한민국의 상황에서 험한 말에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밝은 미소로 상소리를 내뱉는 노인들을 '제압'한 홍씨의 사례는 많은 것을 시사해줍니다. 홍씨는 노인들도 전쟁과 이념ㆍ세대 갈등의 희생자라는 '측은지심'이 들어 이같이 밝게 웃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홍씨 같은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한국 사회의 갈등ㆍ대립도 좀더 성숙해질 수 있습니다. 아직까지 우리 사회는 한 번도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공존을 지향하는 방식으로 갈등과 대립을 해소한 적은 없습니다.

해방 직후 서로 백색ㆍ적색 테러를 저지르는 등 극단적 이념 갈등을 거듭하다 결국 6.25가 일어나 수백만명을 서로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후엔 군사독재가 지속되면서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이라는 미명 하에 모든 사회적 논의는 사실상 금지됐습니다. 1980년대 이후 민주화가 진전되긴 했지만, 여전히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적 토대는 부실하기 짝이 없습니다. 되레 '경제'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세상이 되면서 지난 30년간 쌓아 왔던 민주주의의 자산을 속절없이 날려버렸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취업에 목을 매는 젊은이들에게 기업들이 이념 검증에 나서는 게 바로 이런 후퇴를 상징하는 장면입니다.
서구의 여러 사회에는 이미 오랜 민주주의의 발전 과정에서 생각과 이념이 다르더라도 일단 인정해주고 공존을 지향하는 전통이 서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정치적 견해나 처지ㆍ입장이 다르더라도 극단적으로 다투기 보다는 홍씨처럼 이해와 공존을 지향하는 용기 있고 신선한 갈등해결 방식이 속히 자리잡았으면 합니다.

서론이 지나치게 길었네요.

홍씨의 사진을 지켜보면서 눈부신 미소 다음으로 제 눈에 들어 온 것은 피켓의 내용이었습니다. "애국이란 태극기에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물에 빠진 아이들을 구하는 것입니다"라고 씌어져 있었습니다. 곧바로 얼마전 벌어졌던 광화문광장 태극기 게양대 설치를 둘러 싼 서울시-국가보훈처의 논란이 떠올랐습니다. 지난 연말 보훈처가 "서울시가 반대해 설치가 무산됐다"며 행정조정위원회에 제소하면서 화제가 됐습니다. "국민 80%가 찬성한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어디선가 보도됐습니다. 서울시는 졸지에 "니들은 애국심도 없냐"는 비난에 시달렸습니다. 박원순 시장이 "나는 반대한 적이 없다"고 언론을 통해 공개 해명할 정도였습니다.

경위를 살펴 보면, 사실 보훈처의 주장은 '억지'에 가깝습니다. 서울시도 일단 '설치'엔 동의했습니다. 상시적이냐 한시적이냐를 두고 다퉜을 뿐입니다. 오히려 보훈처가 한시적 설치에 동의했다가 갑작스레 말을 바꾼 것으로 보입니다. 아래의 서울시의 열린광장운영시민위원회 회의록을 보면 그렇습니다.
지난 2015년 8월 개최된 열린광장운영시민위원회 회의록. 내용 속 0000국장은 국가보훈처의 실무책임자로, 당시 회의에 참석해 광화문에 태극기 게양대를 '한시적'으로 설치하겠다고 제안했다.

지난 2015년 8월 개최된 열린광장운영시민위원회 회의록. 내용 속 0000국장은 국가보훈처의 실무책임자로, 당시 회의에 참석해 광화문에 태극기 게양대를 '한시적'으로 설치하겠다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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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 과정을 취재하면서 머릿 속에 떠오른 생각이 바로 홍씨의 피켓 내용과 일치했었습니다. '공동체에 대한 자부심'은 구성원들이 남들에게 자랑할 거리가 있으면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입니다. 상징물을 앞에다 놓고 충성을 맹세시킨다고 되는 게 아니죠.

그래서 해외 사례를 알고 싶었습니다. 외국에도 수도의 중심부에 위치한 대형 광장에 초대형 국기를 걸어 놓는 경우가 있는 지 말입니다. 보훈처에 자료를 요청했습니다. 담당 공무원은 선뜻 "물론 해외 사례도 많다"더니 이메일을 통해 자료를 보내왔습니다. 결론은, 매우 실망스러웠습니다.

자료엔 말레이시아 메르데카 광장, 체코 프라하 대통령궁, 크로아티아 두브로니크 광장, 로마 베네티아 광장, 스페인 마드리드의 시벨레스 광장, 멕시코 멕시코시티의 헌법 광장, 독일 베를린 연방의회 의사당 앞 광장, 사우디아라비아의 제다 '압둘라 국왕' 광장, 미국 워싱턴DC 기념탑 등이 '해외 사례'라는 이름으로 사진과 함께 포함돼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대부분 공공건물 앞에 건물 보다 높지 않게 설치된 게 대부분이었습니다. 이 정도라면 현재 광화문광장 근처에도 정부서울청사,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등에 비슷한 규모의 태극기 게양대가 있습니다. 워싱턴DC 기념탑은 국기 게양대가 아니라 조형물로, 전혀 컨셉이 달라 비교 대상으로 보기 어려웠습니다.
대형국기게양대 해외사례-1

대형국기게양대 해외사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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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보훈처가 시뮬레이션 영상 등을 통해 공개한 광화문광장 태극기 게양대와 비슷한 사례로 볼 수 있는 것은 메르데카 광장, 사우디 제다 광장, 멕시코시티 헌법 광장 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나라들은 이른바 '선진국'들은 아니죠. 일부에서 "선진국들도 다 그런다"는 말은 사실과 다른 것 같습니다. 왕정 국가 또는 식민지 독립 후 아직까지도 발전 단계에 있는, 가끔 혼란이 일어나는 나라들입니다. 중국 톈안문 광장의 국기 하강식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 중국인들의 애국심의 상징으로 유명하지만 대형게양대는 아닙니다. 현 정부서울청사 수준이라고 보면 됩니다.
대형국기게양대 해외사례-2

대형국기게양대 해외사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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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 공무원이 보낸 자료에는 또 '국내 사례'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서울 양재IC(50m), 경기도 구리시 아차산(75m), 용마터널, 천안IC(50m) 등에 설치된 대형태극기 게양대 사전이었습니다. 이외에도 우리나라는 휴전선 인근 대성동 마을(100m) 등 대형태극기가 유독 많습니다.

보훈처가 행정협의조정위원회에 제소한 광화문광장 태극기 게양대 설치 건은 빠르면 2~3월, 늦어도 4월까지는 결론이 나올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총선 직전이죠. 그때쯤 또 다시 서울시의 '애국심'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높아질 겁니다. 정치적 긴장감이 팽팽히 고조되는 그 시점에서 이 사안이 불거지면 과연 누구한테 유리할까요?

홍 씨의 피켓에 씌여있던 "애국이란 태극기에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물에 빠진 아이들을 구하는 것입니다"라는 말을 다시 생각해봅니다. 세월호 참사에서 아이들을 구하지 못한 국가에 대한 실망은 '흙수저', '헬조선'이라는 말이 탄생하는 배경이 됐습니다.

태극기 게양대를 설치하는 일 보다는 취업난에 시달리는 젊은 청년들에게 좋은 일자리를 하나라도 더 만들어 주는 일이 진정한 애국이 아닐까요? 세계 최고의 노인 빈곤율 낮추고,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줘 아이들을 더 낳게 하고, 길게 늘어선 자살자들의 행렬을 줄이는 일, 시민들에게 '저녁'이 있는 삶을 만들어 주는 것. 그렇게 해서 우리나라 시민들을 해외에 나가면 자기 나라 자랑에 정신이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 이게 진정한 '애국의 길'이 아닐까 합니다.




김봉수 기자 bski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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