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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밥 좀 먹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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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과 을의 식사자리는 늘 이 모양이다. 숟가락질, 젓가락질 사이마다 갑의 훈시와 훈계가 상다리를 휜다. 을은 소화불량을 피할 길이 없다. 음식을 절반은 흘리고 절반은 코로 넘긴다. "사장이 저녁을 사겠다며 자리를 마련했는데…"로 시작된 지인의 하소연도 '이 모양'이었다. "올 한 해 고생한 직원들을 격려도 할 겸, 애로사항도 들어볼 겸"이라며 시작된 만찬이었단다.

사장은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오늘은 경청만 할 거'라는 비현실적인 선언을 했다. '나는 들을 준비가 돼 있으니' 어서 빨리, 자유롭게, 얼마든지, 허심탄회하게 말해보라는 엄숙한 표정으로. 이럴 때는 잠시 침묵을 지켜주는 게 을의 올바른 자세다. 눈치 없는 사장은 그런 줄도 모르고 "왜 말을 안 하느냐"며 올해 실적을 슬쩍 꺼내더니 '어서들 얘기해봐' 채근했다가 역시나 잠시도 기다리지 못하고 올해 실책들을, '아니 아직도 얘기를 안 하느냐'면서 내년 목표를 늘어놓는 일장 연설로 '경청의 자리'를 마감했다. 사장의 잔소리로 배를 채운 직원들은 "그럴 거면 경청한다는 말을 하지 말든가" 툴툴거리면서 우르르 우동집으로 몰려갔으니 갑과 을의 식사자리는 어찌 이 모양인지.
밥, 끼니, 식사는 허기를 달래는 생물학적 행위부터 우리가 같은 편인지를 확인하는 사회관계학적 행위까지 다양한 함의를 품고 있다. 74세의 수명을 누린 공자는 즐거운 마음으로 먹는 희식(喜食)과 소식(小食)으로 깨달음에 다가갔고, 대작가 톨스토이는 '영혼의 건강'을 위한 소식과 채식을 일갈했다.

1970년대 미국과 중국의 '핑퐁 외교'도 실은 식사 한 끼로 교착상태가 풀렸다. 회담이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중국의 저우언라이 총리는 미국 특사인 헨리 키신저를 북경오리와 마오타이주로 극진히 대접했고 '식사 후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는 키신저의 훗날 회고처럼, 그 한 끼를 계기로 양국을 가로막던 불신의 벽은 스르르 무너졌다.

미국 해병대도 군법보다 더 엄격한 배식원칙이 있다. 야전에서는 말단 사병부터 배식을 받는다. 고위 장성도 예외일 수 없다. 그 누구도 사선을 넘나드는 병사들보다 먼저 밥을 먹을 자격이 없다는 저들의 서약은 단합을 꾀하고 사기를 드높인다.
갑과 을의 식사자리가 잦아지는 연말, 바람직한 끼니를 궁구한다. 흔하디흔한 밥 한 끼가 어떨 때는 밥값을, 어떨 때는 똥값을 한다. 밥값이냐 똥값이냐는 갑이 결정한다. 그러니 갑이여, 이번 연말 회식자리는 온전히 을에게 맡기시길. 무대를 을에게 양보하시길. 진정으로 경청만 하시길. 카드만 주고 빠진다면 더욱 감사할 테지만.





이정일 금융부장 jaylee@asiae.co.kr<후소(後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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