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은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오늘은 경청만 할 거'라는 비현실적인 선언을 했다. '나는 들을 준비가 돼 있으니' 어서 빨리, 자유롭게, 얼마든지, 허심탄회하게 말해보라는 엄숙한 표정으로. 이럴 때는 잠시 침묵을 지켜주는 게 을의 올바른 자세다. 눈치 없는 사장은 그런 줄도 모르고 "왜 말을 안 하느냐"며 올해 실적을 슬쩍 꺼내더니 '어서들 얘기해봐' 채근했다가 역시나 잠시도 기다리지 못하고 올해 실책들을, '아니 아직도 얘기를 안 하느냐'면서 내년 목표를 늘어놓는 일장 연설로 '경청의 자리'를 마감했다. 사장의 잔소리로 배를 채운 직원들은 "그럴 거면 경청한다는 말을 하지 말든가" 툴툴거리면서 우르르 우동집으로 몰려갔으니 갑과 을의 식사자리는 어찌 이 모양인지.
1970년대 미국과 중국의 '핑퐁 외교'도 실은 식사 한 끼로 교착상태가 풀렸다. 회담이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중국의 저우언라이 총리는 미국 특사인 헨리 키신저를 북경오리와 마오타이주로 극진히 대접했고 '식사 후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는 키신저의 훗날 회고처럼, 그 한 끼를 계기로 양국을 가로막던 불신의 벽은 스르르 무너졌다.
미국 해병대도 군법보다 더 엄격한 배식원칙이 있다. 야전에서는 말단 사병부터 배식을 받는다. 고위 장성도 예외일 수 없다. 그 누구도 사선을 넘나드는 병사들보다 먼저 밥을 먹을 자격이 없다는 저들의 서약은 단합을 꾀하고 사기를 드높인다.
이정일 금융부장 jaylee@asiae.co.kr<후소(後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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