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기의 책보기] 이병률 여행 컬렉션
남자의 로망이 시계와 만년필이라고 한다. 동의하지 않는다. 남자의 진짜 로망은 무위도식이다. 최소한 나를 포함해 내 주변에 많은 중년 이상의 남자들은 그렇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되 그냥 방구석에서 뒹구는 게 아니라 전국 팔도, 세계 구석구석 여행이나 어슬렁어슬렁 다니는 것이다. 그저 장식용일지라도 어깨엔 카메라, 상의 주머니엔 수첩과 펜을 꽂고서 말이다.
로망이 로망인 것은 로망이기 때문인가. 지금까지 그래 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러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끌림>,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내 옆에 있는 사람> 등 세 권의 여행 산문집을 묶은 문고판 <이병률 여행 컬렉션>은 그래서 부럽고 또 부럽다. 앞의 두 책은 예전에 출판된 스테디셀러이고, 세 번째는 최근에 출판된 신간이다.
1956년 ‘추봉령’이란 필명을 쓴 박봉우 시인의 모 일간지 신춘문예 당선작 ‘휴전선’이 있다.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동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아무런 죄도 없이 태어난 꽃은 시방의 자리에서 얼마를 더 살아야 하는가. 아름다운 길은 이뿐인가.’라며 ‘아름다움’을 노래하지 못하는 시인의 처지를 한탄했다. 혹여 그 시인이 <이병률의 여행 컬렉션>을 읽게 된다면 아마도 절망에 몸서리를 칠 것 같다. 이병률 시인은 전 세계의 아름다운 풍경, 아름다운 사람들만 보고 돌아다녔고, 더구나 그것들을 아름다운 글로 남기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이병률 시인의 여행 산문집 팬들이 소리소문 없이 많은 이유는 뭘까? 세 권의 책을 보면 그 이유가 쉬이 보인다. 스마트 폰 시대의 독서경향에 어울린다는 것이다. 분위기 있게 잘 찍은 사진과 짧은 글. 중년의 남자답지 않은 부드럽고, 달콤하고, 촉촉한 문장. 거기에 낯선 사람 사이를 잇는 심연의 원초적 감정 ‘사랑’을 포착해 내는 시인의 순수가 물기 마른 현대인의 가슴을 파고 든다. 같은 류의 여행 산문집이지만 장문의 텍스트 위주인 곽재구 시인의 <포구기행>, <길귀신의 노래>와 차별되는 점이다.
<끌림>,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는 파리, 세르비아, 예맨, 몰타, 난징 등 세계 곳곳의 남녀노소와 풍경과 사랑이 흐른다. 새로 펴낸 <내 옆에 있는 사람>은 제목대로 반도의 이웃들과 부대끼는 국내 여행기다. 특히나 이병률 시인이 여행을 즐기는 이유는 ‘낯설고 외롭고 서툰 길에서 사람으로 대우받는 것, 그래서 더 사람다워지는 것, 그게 여행이라서’다.
그러나 누구든 ‘이병률’을 함부로 탐할 일은 아니다. 친척 결혼식에 부모님 대신 전달할 축의금으로 일주일 간 행방불명 여행을 즐겼다가 죽도록 맞았던 고등학생 시절이 없다면. 역마살 때문에 결혼하면 민폐가 될 것 같아 혼자 살지 않는다면. 인간의 정이 넘치는 이병률 시인의 문장처럼 ‘사람은 원래 착한 심성으로 태어난다’는 ‘성선설’을 신봉하지 않는다면.
2004년 11월 20일, 파리에서 맞이한 생일에 쓴 그의 글 일부이다. ‘오늘 오랜만에 밥이 먹고 싶어서 쌀 파는 곳을 겨우 찾아낸 다음 쌀을 사서 밥을 하고 계란 프라이 두 개를 해서 들고는 가을 잎들이 뚝뚝 떨어져 내리는 저녁의 공원에 가서 먹었는데 나는 그 정도 행복이면 돼요. 달걀 두 개의 값과 양과 맛을 넘어서지 않는 행복.’
<이병률 지음/달/ 2만8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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