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장뉴스] 신격호 회장의 의중과 '함흥차사'의 진실
☞ [짜장] (1) '과연 정말로'라는 뜻의 순우리말 (2) 춘장을 볶은 중국풍 소스.
짜장뉴스는 각종 인터넷 이슈의 막전막후를 짜장면처럼 맛있게 비벼 내놓겠습니다. 과연? 정말로?
롯데家의 '왕자의 난'으로 인해 새삼 관심이 집중된 역사가 있습니다. 왕자의 난의 원조격이라고 할 수 있는 600여년 전 무인정사(戊寅定社)입니다. 당시 이방원은 세자로 책봉된 이복형제를 죽이고 권력을 잡았고 결국 형인 방과(정종)에 이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태종입니다.
물론 피 비린내 나는 역사를 오늘날 기업의 경영권 분쟁에 대입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지금 신격호 총괄회장의 의중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은 과거 이방원이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계속해서 이성계에게 '함흥차사'를 보냈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차남과 장남 사이를 오간 신격호 회장의 의중은 알 길이 없지만 함흥차사를 둘러싼 이야기들에서는 못내 아들이 못마땅했던 이성계의 의중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역사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격언에 기대 함흥차사의 진실을 한 번 들여다봅니다.
◆함흥차사는 죽지 않았다=한 번 가면 소식이 없는 사람을 일컬어 '함흥차사'라고 합니다. 동생을 죽이고 왕위를 차지한 이방원에 분노한 태조 이성계가 궁을 떠나 함흥에 머물렀고, 아버지로부터 왕위 계승의 정당성과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한 이방원이 아버지를 다시 궁으로 데려가기 위해 차사를 보내 설득하지만 오는 족족 이성계가 죽여 돌아가지 못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하지만 이는 역사에 기록된 사실은 아니라고 합니다. 실제로 함흥에 갔다가 목숨을 잃은 이는 박순과 송유입니다. 그런데 실록에 따르면 그들은 이성계가 죽인 것이 아니라 당시 안변부사 조사의가 일으킨 반란군에게 죽었습니다. 함흥 인근인 안변에서 난이 일어나자 이방원이 박순을 이 지역에 급파했고, 박순은 이곳에서 난에 가담하지 말라고 지방 수령들을 설득하다가 피살됐다는 겁니다.
박순이 죽자 이방원은 다시 송유를 함흥에 보내 그의 역할을 대신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송유 역시 반란군에 의해 죽고 말았습니다. 정리해보면 이성계가 머물던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이 난이 확산되는 것을 막고 진압하기 위해 박순과 송유를 함흥에 보냈는데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것입니다. 이후에도 이방원은 함흥에 차사를 보냈고 반란군에 막혀 발길을 돌린 이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성계를 만난 뒤 무사히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조사의의 난이 평정된 뒤 이성계는 수도로 돌아왔습니다.
◆조사의의 난 배후에 이성계가?=그런데 이 안변부사 조사의의 난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안변은 함흥 근처이며 조사의는 이방원이 살해한 이복동생의 생모 신덕왕후 강씨의 일족이었다고 합니다. 난을 일으킨 명분도 이방원에게 살해당한 이들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였습니다. 반란군이 있던 지역에 이성계도 있었기 때문에 모종의 관계가 있었을 수 있다는 추정도 가능합니다. 이방원은 표면적으로 반란군 지역에 머물고 있는 아버지의 안전을 걱정해서 차사를 보낸 것이지만 어쩌면 이성계와 반란군의 결탁을 우려해 계속해서 차사를 보낸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함흥차사의 유래가 잘못 알려진 것은 역사서가 아닌 야담집 '축수편'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함흥에 차사로 간 성석린이 이성계를 만났는데 "귀공은 나를 달래러 온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생명의 위협을 느껴 "제가 그런 이유로 왔다면 제 아들들의 눈이 멀 것입니다"라고 거짓말을 해 목숨을 건졌지만 그의 두 아들은 장님이 됐다는 전설입니다. 하지만 실록에 따르면 성석린은 이성계가 안변과 소요산에 있을 때 차사로 갔을 뿐 함흥에는 간 적이 없다고 합니다.
축수편에는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도성으로 돌아온 이성계는 멀리서 아들을 보자 바로 활을 쐈지만 이방원은 큰 기둥 뒤에 몸을 숨겨 목숨을 건졌습니다. 이에 아버지는 탄식하며 "내가 졌다"고 하며 옥새를 넘겨줬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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