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하게 위대하게?' 화학약품상은 왜 간첩이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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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김재연 기자]'그래 북한에서 안전하게 마약을 만들어 보자'


'IMF 국가부도'의 먹구름이 나라를 뒤덮고 있던 1997년. 마약사범으로 수차례 철창신세를 진 적이 있는 방모씨(68세·당시 50세)는 지인의 이야기를 듣고 무릎을 탁 쳤다. 중국에서 사업을 하던 지인 이모씨는 북한 공작원이 '필로폰을 같이 제작하자'고 제안했다며 방씨를 연결해주겠다고 했다.

◆필로핀 만들러 2차례 방북…정작 판매는 실패= 방씨는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구상하자마자 화학약품을 팔던 김모(62세·당시 44세)씨와 화학약품 업체에 다니던 황모 (56세, 당시 38세)씨를 떠올렸다. 일종의 화학약품인 마약을 다루다 자연스럽게 알고 지내게 된 이들이었다.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방씨의 설득 끝에 일당 3명은 1998년 11월 중국을 통해 북한으로 밀입국 했다.


원대한 꿈을 꾸고 간 북한이었지만 일행은 필로폰 제조에 실패했다. 일부 원료가 조달이 안돼 마약 제조 장비를 설치하는 데 만족해야 했기 때문이다.

훗날을 기약한 방씨 일행은 2000년 7월께 북한을 다시 찾았다. 이전과 같은 실패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다한 터였다. 중국에선 필로폰 제조에 필요한 반응로·냉각기를 사 '단동-신의주'로 들여왔다. 나머지 필로폰 제조 설비 및 화학약품은 국내에서 '부산-나진' 항로로 들여왔다.


방씨 등은 우리로 치면 국정원인 북한공작조직에서 필로폰 70㎏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현재 시가로 치면 3010억원 어치다. 일당은 약속대로 장소를 제공한 북한 당국에 절반인 35kg를 떼어줬다.


성공을 눈 앞에 둔 시점에서 이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판매를 부탁했던 중국 유통책이 중국 공안에게 마약을 압수당했기 때문이다. 한국에 들어온 3명은 하는 수 없이 각자 택배기사·유통업 등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은밀하게 위대하게?' 택배기사의 간첩 활동=영화와 같은 상황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어느 정도 이들을 신뢰할 수 있다는 판단이 든 북한 당국은 김씨·황씨에게 지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전투 능력이 일반인 수준인 당시 40~50대 마약제조업자들에게 각종 공작 업무를 맡기기 시작한 것이다.


수사팀 관계자는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많이 줄어들었지만 예전에는 공작원들이 국내 일반인 등을 포섭해서 간첩활동을 한 경우가 많이 있었다"고 말했다.


당시 45세로 가장 어렸던 황씨는 2004년 중국에서 북한 인권운동을 하는 독일인을 암살하려는 지령을 받았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택배기사였던 김씨는 2009년 9월 베이징에서 접촉한 북한 공작원 장모씨로부터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을 암살하라는 지령을 받고 실행방안을 논의했다. 활동비로 4만달러(약 4346만원)를 받았으나 총을 지급 받지는 못했다. 김씨의 암살모의는 황 전 비서가 2010년 10월 돌연 사망하면서 끝을 맺게 된다.


김씨는 가족들에게 중국에 볼 일이 있다며 둘러댄 뒤 수차례 북한 공작원을 만났다. 그는 만날 때마다 국내 가스저장소·열병합발전소 위치·국내 지도책 등을 넘겼다.


북한 공작원이 당 간부에게 갖다 준다고 부탁해 쌍안경 2개·체지방 측정기·공기주입식 안마기 등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2013년에는 '2012-2013 한국군 무기연감'을 사오라는 지시를 받고 서점에서 구입해 가져다 줬다.


수사팀은 김씨·황씨가 단순히 돈만 보고 간첩활동을 한 것은 아니라고 보고 있다. 실제 김씨는 '김정일 장군의 정치적 신임을 받았다' '조국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등의 내용이 담긴 충성맹세문도 제출했다. 반면 방씨는 마약 제조 유통에만 관심을 쏟은 것으로 보인다. 실제 북한 당국도 방씨와는 마약 거래 방안만 논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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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팀관계자는 "3명 모두 (북한에 대해)받아 들이는 입장이 조금씩 다르다"며 "일부는 꼭 돈만 가지고 (간첩)활동을 한 것은 아니다라고 증언했다"고 말했다.


이들의 범행은 귀순한 북한 공작원 장씨가 사실을 털어 놓으면서 드러났다. 수사팀 관계자는 "황장엽 암살 시도에 국내 일반인이 이용됐다는 사실이 처음 드러난 사건"이라며 "공범 존재 여부를 계속 추궁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재연 기자 ukebida@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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