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명견 교수의 패션 메신저]구한말 조선 외교관의 패션과 시련
리퍼트 주한 미 대사의 피습 사건은 많은 국민들을 황당하고 안타깝게 했다. 한미관계가 더 할 수 없이 돈독했던 데다, 이 나라에서 미국 대사가 피습을 당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놀라움이 더욱 컸던 것 같다. 특히 리퍼트 대사는 우리나라에서 미국을 대표하는 상징적 존재이기 때문에 혹시라도 한국에 대한 미국 내 여론이 나빠지는 건 아닌가 하는 우려까지 제기됐다. 그러나 리퍼트 대사는 의연했다. 그는 걱정해줘 고맙다며 "같이 갑시다"라는 글을 띄워 우리를 안심시키기까지 했다. 대단치 않은 '시련'쯤으로 치부하는 느낌마저 주는 대목이었다.
테러 같은 '사건'이 아니더라도 남의 나라에서 근무하는 외교관들에게는 시련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환경과 문화가 다른 것부터가 시련이다.
조선왕조 말, 처음 미국으로 떠난 이 나라 외교관들은 '패션' 때문에 그런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최초의 주미 전권 공사 발령을 받은 박정양 일행 10명은 차림새부터 서양인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영국 국적의 태평양 횡단 여객선 오셔닉(Oceanic)호가 이들을 태우고 요코하마 부두를 떠난 것은 1887년 12월10일이었다.
승객 대부분은 태평양을 오가며 차(茶)를 사고파는 상인이었다. 일등실 승객 중에는 동양인도 있었고 서양인도 있었지만, 단 다섯 사나이를 제외하면 모두 말끔한 양복 차림이었다. 문제의 다섯 사나이는 높고 까만 비단 모자(紗帽)를 쓰고, 가슴에 알록알록한 장식(흉배)이 달린 검은 비단옷(黑團領)을 입었으며, 바닥에 나무를 덧댄 가죽신(靴子)을 신고 있었다. 차림새는 그들과 약간 달랐지만 다섯 사나이와 동행임이 분명한 승객이 2등석에 2명, 3등석에 3명 더 있었다. 이 기이한 복장의 다섯 사나이와 동행한 미국인 의사 알렌은 신기한 듯 쳐다보는 일등실 승객들에게 그들이 미국에 부임하는 초대 조선공사 일행이라고 입이 닳도록 소개해야했다.
미국 도착 후에도 이들의 차림새는 모든 이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어느 날 공사 일행이 소매가 넓고 치렁치렁한 겉옷(흑단령이었을 것임)에 화려하게 수놓아진 흉배를 달고, 사모를 쓴 채 각대(계급에 따라 금, 은, 뿔 등이 장식된 허리에 두르는 벨트)를 하고 워싱턴 시가를 거닐었다. 구경거리였다. 졸졸 뒤따라오든 아이들이 이 '해괴한' 모습에 놀라 돌을 던졌다. 타국의 외교관이 돌에 맞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경찰이 아이들을 붙잡아갔다. 그러자 박공사가 뒤쫓아 가 아이들을 석방시켰다. 이 사건으로 조선공사의 이상한 모습과 함께 '인자하다'는 소문이 퍼져 더욱 인기를 모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시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초대받은 수영장에서는 '점잖은 체면에' 사람들 앞에서 옷을 벗을 수 없어 '정장차림으로' 물속으로 들어갔다. 버선을 신은 채 구두를 신기도 했다. 다 시련이었다.
물론 시련과 테러는 다르다. 그러나 비온 뒤에 땅은 더 굳어지는 법이다. 리퍼트 대사는 첫 아이에게 한국이름을 지을 만큼 '한국사랑'이 남다른 미국인이다. 테러 후에도 오히려 '겁먹고 법석을 피우기까지 하는' 우리를 위로하고 있다. 리퍼트 대사의 따스함이 이 어려움을 한단계 승화 시킬 것이라고 믿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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