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철의 인사이드스포츠]슈틸리케 감독이 바라는 축구의 '이상수'
지난달 31일 시드니의 스타디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열린 한 편의 드라마 같은 경기가 끝난 뒤 울리 슈틸리케 감독은 한국 축구, 나아가 한국 스포츠가 안고 있는 문제를 정확하게 짚었다. 학원 스포츠가 중심이 된 선수 육성 체제다. 슈틸리케 감독은 운동을 즐기는 게 아닌, 이겨야 하는 ‘성적 지상주의’에 빠져 있는 한국 스포츠의 현주소를 족집게처럼 집어냈다. 그는 지난해 9월 한국 축구 대표팀 사령탑에 선임됐다. 5개월 여 만에 한국 스포츠가 안고 있는 숙제를 찾아낸 것. 연장 접전 끝에 호주에 1-2로 아쉽게 진 2015년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 결승전 이후 한국 취재진과 진행한 인터뷰에서 나온 내용이다.
1895년 4월 우리나라 첫 공립학교인 한성사범학교의 교과 과정에 체조가 포함된 것을 시작으로 우리나라 스포츠는 학교를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20세기 초 YMCA 같은 종교 기관이 야구와 축구 농구, 배구 등의 보급과 발전에 일정 부분 이바지했지만 일제 강점기 스포츠 발전은 학교가 이끌었다. 대한체육회 90년사는 19세기 후반 우리나라 학교 스포츠의 태동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근대 올림픽이 그리스 아테네에서 첫 대회를 열었던 1896년 이 땅에서는 첫 운동회가 열렸다. 그해 5월 2일 서울 동소문 밖 삼선평(오늘날 삼선교 근처)에서 외국어학교 분교인 영어학교 영국인 교사 허치슨 지도 아래 열린 운동회가 우리나라 학교 운동회의 효시다. 이 운동회를 취재 보도한 당시의 독립신문를 보면 ‘영어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동소문 밖으로 야유회를 갔다. 오랫동안 학교 교실에 갇혀서 공부만 하다가 좋은 날씨에 경치 좋은 곳에 가서 맑은 공기를 마시며 운동을 하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다. 마음과 지식을 키우는 것도 매우 소중하지만 몸을 튼튼히 키우자면 맑은 공기 속에서 운동하고 목욕을 자주 해서 몸을 깨끗이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돼 있다."
그해 5월 30일에는 정부 고관과 각 학교 교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훈련원(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동대문운동장 자리)에서 관립 소학교(오늘날의 초등학교)의 연합 운동회가 열렸다. 두 운동회가 우리나라 학교 스포츠의 시발점이다.
오늘날 세계 10강을 자랑하는 한국 스포츠는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학교 체육에 크게 도움을 받았다. 인기 종목 가운데 하나인 야구를 들어 보자. 1960~1970년대 고교 야구 열기가 한창일 때 선린상고와 부산상고, 대구상고, 군상상고 등은 야구 명문교로 이름을 날렸다. 이들 상업학교 야구의 뿌리는 일제 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0년대에 등장하는 상업학교 야구부는 경성상고와 인천상고, 평양상고, 목포상고, 신의주상고, 원산상고 등으로 전국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다. 상고와 고교 야구의 쌍벽을 이루는 인문고(부산고, 경남고, 경북고, 광주일고, 대전고 등)의 전국 대회 성적을 펼쳐 놓으면 그게 그대로 고교 야구사이자 한국 야구사가 된다.
2015년 AFC 아시안컵을 끝으로 태극 마크와 이별한 차두리의 출신교 배재고와 차두리 아버지 차범근의 모교인 경신고, 1960년대 말~1970년대 초 한국 최고의 스트라이커 이회택의 동북고, 최근 한국프로축구연맹 부총재로 선임된 허정무의 영등포공고 등은 축구 올드 팬들 귀에 익은 축구 명문교다. 농구의 용산고와 휘문고, 배구의 대신고와 인창고 등도 중·장년 스포츠 팬들의 기억에 생생한 스포츠 명문교다.
그런데 최근 학교 스포츠는 큰 변화에 직면하고 있다. ‘공부하는 운동선수, 운동하는 학생’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지 않더라도 성적 중심의 기존 학원 스포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글쓴이가 지난 3년 사이 둘러본 서울 시내 초·중등학교 20여 야구부는 한 학교도 예외 없이 정규 수업을 마치고 훈련했다. 훈련 시작 시간이 대체로 오후 4시였다. 물론 방학 기간 전지훈련을 하는 등 집체 훈련은 여전하지만 운동을 하는 방식이나 아이들의 생각이 눈에 띄게 바뀐 게 사실이다.
글쓴이는 지난해 가을, 학교 스포츠의 발전 방향과 관련한 한 가지 사례를 체육계 인사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지난해 5월 인천광역시에서 열린 제43회 전국소년체육대회에서 수영 남중부 자유형 2관왕(50m·100m)에 오른 강원체육중학교 3학년 이상수의 이야기다. 이상수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우연히 참가한 여름방학 수영 특강에서 재능을 보였다. 그래서 체육인재육성재단에서 운용하고 있는 체육영재센터에 지원해 수영의 기초를 다졌다. 이상수는 수영에만 자질이 있었던 게 아니었다. 체육영재센터에서 운동을 하면서 나온 각종 자료에서 이상수는 육상경기에도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그런데 이상수는 수영이 좋다고 했고 부모도 아들의 뜻을 따랐다고 한다. 그때 하나의 의문이 생겼다. 요즘 상당수의 학부모들은 자녀가 운동에 소질이 있어 보이면 야구나 축구, 아니면 농구나 배구 등 프로가 활성화돼 있는 종목을 시키고 싶어 한다. 이상수의 부모는 아들이 수영이 좋다고 했고 체육중학교에 가겠다고 한 것도 아들 뜻이었다고 한다. 야구나 축구 등 다른 종목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는 3월 강원체육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이상수는 운동만 하는 선수에서 벗어나 전인적인 사람이 되기 위한 첫걸음으로 지난해부터 공부에 열의를 보이고 있다. 중학교 마지막 기말고사 성적도 그래서 아주 좋게 나왔다고 한다. 국가대표 선수가 되는 건 모든 운동선수의 꿈이다. 그런데 이상수와 그의 부모는 그 뒤 일까지 내다보고 있었다. 체육 교수가 되는 것이다. 이상수는 체육인재육성재단이 발굴한 매우 모범적인 운동선수다. 선수 본인은 물론 부모도 운동선수로서 어떻게 활동하고 어떻게 미래를 설계해야 할지를 확실하게 그림을 그리고 있다. 제2의 이상수, 제3의 이상수가 줄지어 나올 때 한국 스포츠의 패러다임은 저절로 바뀔 것이다.
신명철 스포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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