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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프런티어]"난 여자란 생각,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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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 카피로 대박낸 그녀

현대차그룹 캠페인 이끄는 김혜경 이노션 월드와이드 전무
기자 꿈 접고 카피라이터 30년 외길
여성의 약점 최소화 강점은 극대화
현대차 첫 女 임원 된 비결이냐고요?
그랬다면 지금 더 높은 자리에,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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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은정 기자, 사진= 백소아 기자] 배우 한석규가 스님과 함께 대나무숲을 걷는다. 나란히 걷는 동안 스쳐가는 바람소리, 산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귀를 간질인다. 이내 휴대폰이 울리며 정적을 깬다. 잠시 후 부드럽게 깔리는 목소리. "또 다른 세상을 만날 땐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
1998년 이동통신사들이 경쟁적으로 전국 곳곳 잘 터진다고는 광고를 할 때 SK텔레콤이 차별화를 꾀했던 광고다. 깊은 산 속에서도 전화가 터지는 기술력을 압축적으로 잘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으며 SK텔레콤의 대표 광고가 됐다. 2010년 배우 엄기준이 이를 거의 그대로 재현했을 정도다. 올 초에도 배우 전지현과 이정재가 LTE-A 광고를 하면서 'SK텔레콤 고객이라면 신경, 꺼두셔도 좋습니다'며 광고 문구를 리메이크 했다. '꺼두셔도 좋습니다'란 이 문구는 그야말로 SK텔레콤 30년 역사와 진배없는 셈이다. 김혜경 이노션 월드와이드 전무가 바로 이 광고 제작자다.

1984년 11월 말단 카피라이터로 시작해 올해로 꼬박 30년째 이 길을 걷고 있다. SK텔레콤 광고 외에도 KT, KTF, 삼성증권, 풀무원 등 국내 내로라 하는 기업 광고가 그녀의 손을 거쳐 갔다. 지금은 현대차그룹의 제네시스, 그랜저, 쏘나타 등의 현대차 캠페인을 총괄하고 있다. 2008년 말, 처음 별(임원)을 단 후 2011년 전무로 승진했다. 남성적 이미지가 강한 현대자동차그룹의 최초 여성 임원 기록이다. 김 전무는 "힘든 일도 많았지만 그래도 늘 경쟁하며 새로운 도전을 해야 하는 광고 일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중독된 것 같다"며 "30년째 이 일을 하고 있지만,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들게 해 좋다"며 활짝 웃었다.

◆기자를 꿈꿨던 광고쟁이= "우와! 우리는 반대 모습으로 만날 수 있었겠는데요. 사실 저는 글 쓰기를 좋아해 기자를 꿈꿨답니다."
광고대행사 면접에서 떨어진 후 광고업계엔 눈길도 주지 않았다는 기자의 고백에 김 전무는 환하게 웃으며 그동안 숨겨놓았던 이야기 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1984년 대홍기획 카피라이터로 광고업계에 첫발을 내디딘 그녀의 꿈은 원래 신문기자였다. 대학 졸업을 앞둔 23살, 그 무렵에는 광고인이라는 직업이 흔하지 않았다. 카피라이터가 무슨 일을 하는지조차 몰랐다. 대홍기획에서 카피라이터를 공개채용 한다는 소식을 듣고 '신제품을 홍보하고 정보를 전달하는' 글을 쓰는 직업이려니 생각했다. 광고업계와의 30년 인연이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그저 글 쓰는 창작 직업인 줄 알았지만 광고는 창작, 기획, 영업을 총망라한 종합 비즈니스였다. 배우면 배울수록 끌리는 매력이 있었다. 나만의 문구로 제작한 광고가 전파를 탈 때면 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업무 스트레스는 상당했다. 특히 광고주가 여러 광고기획안을 심사하는 경쟁 프레젠테이션(PT)은 총성 없는 전쟁터였다. 광고쟁이들은 늘 모든 PT에서 승리할 것이라 믿지만 모두가 승자는 아니다. PT에서 한번 두번 실패하다보면 슬럼프에 빠진다. 김 전무도 그랬다.

"슬럼프가 없었다면 거짓말이지요. 이동통신 광고전이 심했던 2000년대 한 브랜드가 광고 1건, 1건을 모두 경쟁 PT에 붙인적이 있었습니다. 많으면 한 달에 3~4번 정도 PT를 했는데 대부분 졌어요. 1년여를 이유조차 모른 채 계속 지니까 나중에는 너무 화가 나더라고요. 일을 계속해야 하느냐는 좌절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막판엔 칠판만 보며 PT를 할 정도였습니다."

김 전무는 결국 "광고주를 포기하든지, 회사가 나를 포기하든지 해달라"며 배수진을 쳤다. '잘려도 어쩔 수 없다'며 자포자기했다. 1년여간의 도전 과정을 지켜봤던 회사는 그녀 손을 들어줬다. 이기든 지든 PT 결과물을 상세히 기록한 그녀를 중요한 인적 자원으로 여긴 것이다. 김 전무는 "그때 회사가 나를 포기했다면 지금은 광고가 아닌 다른 일을 하고 있을 것"이라면서 "그때 실패 경험을 겪으며 전투력은 확실히 높아졌고, 이젠 웬만한 난관은 별로 어렵게 느껴지지 않는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때의 쓰라린 경험이 스스로를 단련시키는 약이 됐다는 얘기다.

PT 경쟁만큼이나 힘든 일은 광고주와의 관계다. 광고업계는 상대적으로 여성 직원 비중이 큰 분야지만 영업 등 대외업무를 주로 담당하는 마케터는 남자들이 많다. 광고주 대부분이 남자다 보니 아무래도 남자 마케터가 유리한 것도 사실이다. 남자들만이 아는 얘기, 남자들만이 통하는 코드. 이 보이지 않는 벽을 그는 어떻게 넘어섰을까. 답은 간단했다. '그냥 부딪혔다.' 여성으로서의 약점은 최소화하고 여성으로서의 강점은 극대화하는, 일종의 정공법이었다.

"요즘은 흔하지 않지만 당시에는 개인적인 일까지 부탁하는 광고주가 있었어요. 그런 불합리한 부탁에 남자들은 일단 한발 물러서서 참는 편인데 여자들은 바로 드러내죠. 그런 점에서 한 호흡을 쉬고 물러서서 상황을 지켜보는 노련함도 필요한 것 같아요. 창의적인 아이디어만으로 모든 것이 이뤄지지 않으니까요. 인간관계도 매우 중요하니까요."

여자들도 남자들의 조직문화를 배울 필요가 있다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김 전무에게 "현대차 최초 여성 임원이 된 비결인 것이냐"고 넌지시 물었더니 손사래를 치면서 "그랬다면 지금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었을 것 같다"고 웃음으로 맞받아쳤다. 그러면서 "아직도 많은 게 부족하다"고 고백했다.

◆리스크가 클수록 얻는 것도 많다= 그녀가 광고쟁이 일에만 집중할 수 있는 배경에는 가족들의 헌신도 한몫했다. 가사는 남편이 도왔고 아들 육아는 시어머니가 도맡았다. 간혹 텔레비전에서 자신의 작품이 나오면 아들에게 '엄마가 만든 것'이라고 알려줬다. 엄마로서 희생적이지는 않았지만 지금 대학교 3학년인 아들은 "엄마가 자랑스럽다. 앞으로 엄마처럼 열심히 살겠다"고 말한단다. 김 전무는 "모두 다 가질 수 없다"며 "후배들이 가사나 육아를 맡기기로 했으면 불안해 하지말고 진짜 믿고 모두 맡겼으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가사와 육아의 부담을 덜고 일에 집중하면서 김 전무도 광고 전문가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칸 광고제와 애드페스트 등 세계 주요 광고제 심사위원으로 활약하며 국내 광고인의 위상을 높였다. 2011년에는 광고진흥발전 유공자 정부 포상을 받기도 했다. 광고쟁이라면 부러워할 성과를 거뒀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 현대기아차를 사랑받는 브랜드로 키워내는 것, 모든 이들로부터 혁신적이라고 평가받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그가 매일매일 끌어안고 고민하는 숙제다.

"현대기아차가 좋은 차를 만들어 세계 5위의 자동차 회사로 성장한 것에 걸맞게 브랜드 파워도 함께 키워내야 합니다. 현대기아차에서 기술의 발전을 통해 신차를 개발하듯, 저는 오랫동안 사랑 받을 수 있는 브랜드가 되기 위한 전략을 짜야 합니다. 앞으로 현대기아차를 장수 브랜드로 키울 좋은 인재도 많이 양성해야 합니다."

김 전무는 광고쟁이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리스크가 크면 잃는 것도 많지만 얻는 것도 많다"며 "잃을까 겁내지 말고 목표를 크게 잡고 모험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모험을 크게 걸었다가 설령 실패하더라도 생각보다 잃는 것이 작으니까." 이 순간 그녀의 눈빛이 승부사처럼 반짝였다.

◆김혜경 전무는…
▲1963년생
▲1985년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84.11~1988.12 대홍기획 카피라이터
▲1989.1~1996. 1 누리기획 제작팀장
▲1997.2~1999. 7 제일보젤 CD
▲1999.2~2004. 8 휘닉스컴 CD
▲2004.9~2006. 6 TBWA KOREA ECD(전문임원)
▲2006.7~ 이노션 월드와이드 전무




이은정 기자 mybang21@asiae.co.kr
사진=백소아 기자 sharp2046@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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