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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철의 인사이드스포츠]축구·농구 '술 대결' 다시 보고 싶다

최종수정 2014.08.11 09:32 기사입력 2014.08.11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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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농구 대표팀[사진=김현민 기자]

남자 농구 대표팀[사진=김현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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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아시아경기대회조직위원회는 20일부터 22일까지 사흘 동안 열리는 인천아시안게임 단체 종목 조 추첨 행사와 국제 학술 대회에 북한이 참가할 것이라는 의사를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 사무국을 경유해 알려왔다고 8일 밝혔다. 우리나라가 세 번째 개최하는 아시아경기대회가 코앞으로 다가온 느낌이다.

2015년 광주 하계 유니버시아드대회와 2017년 20세 이하 국제축구연맹 남자 월드컵,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 2019년 광주 세계수영선수권대회 등 대규모 스포츠 이벤트가 줄줄이 열리니 아시안게임 정도는 이제 스포츠팬들에게 구미를 당길 만한 대회가 아닌 듯하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아시안게임은 프로복싱, 프로야구 등과 함께 스포츠팬들의 관심사 가운데 하나였다. 그래도 몇몇 종목은 여전히 스포츠팬들의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남자 축구와 남자 농구가 대표적이다.
먼저 농구를 살펴보자. 지난달 한국과 뉴질랜드의 평가전이 열린 서울 잠실학생체육관에는 연일 만원이 들어찼다. 한국은 원정 3경기와 홈 2경기에서 2승 3패를 기록했는데 승패는 큰 의미가 없다. 홈 2경기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만원사례’를 이뤘다는 사실이 주목할 만하다. 프로리그가 아닌, 국가대표팀 경기에 이렇게 많은 관중이 몰린 건 요즘 흐름과 동떨어진 일이다.

이 특별한 현상에 글쓴이는 두 가지를 생각했다. 조성민, 김종규, 김태술, 양동근, 문태종 등 프로리그 인기 선수들과 대학 최고선수 이종현 등의 관중 흡인력이 첫 번째다. 두 번째는 인천 아시안게임 우승에 대한 농구 팬들의 기대감이다. 1998년 방콕 대회부터 이번 인천 대회까지 5회 연속 아시안게임에 나서는 김주성의 선수 경력 등이 이를 증폭시켰다고 본다.

손흥민[사진=김현민 기자]

손흥민[사진=김현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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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은 2002년 부산 대회에서 중국을 연장 접전 끝에 102-100으로 꺾고 1970년 방콕 대회, 1982년 뉴델리 대회에 이어 세 번째로 아시안게임 정상에 올랐다. 당시 멤버 가운데 현역은 김주성이 유일하다. 그는 그냥 우승 멤버가 아니다. 야오밍(23득점 22리바운드)이 버티고 있는 중국 골밑을 부지런히 파고들면서 팀 내 최다인 21득점했다. 금메달의 일등 공신이었던 셈. 선수 생활의 마지막 아시안게임이 될 김주성에게 거는 농구 팬들의 기대는 특별한 듯하다.
축구는 손흥민의 대표팀 선발 여부가 관심을 끌면서 덩달아 인천 아시안게임에 대한 흥미까지 높아지고 있다. 손흥민은 오는 14일 발표될 예정인 20명의 엔트리에 포함될 것이 확실하다. 다만 A 대표팀 차출이 의무화돼 있지 않은 아시안게임이기에 소속 클럽인 레버쿠젠이 2014~15 시즌이 한창인 가운데 손흥민을 내줄지가 변수다. 레버쿠젠이 제한적으로, 예를 들어 8강전 이후 출전을 허용할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는 있다. 손흥민 외에 24세 이상 와일드카드에 대한 관심도 제법 크다. 야구에서 병역 미필 선수 선발과 관련해 한바탕 논란이 있었지만 축구도 금메달을 따면 병역 혜택이 있기 때문에 최근 들어 더욱 활발해진 외국 리그 진출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런저런 까닭으로 인천 아시안게임 축구와 농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으니 대회조직위원회 관계자들에게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관심을 갖게 하는 요인은 하나 더 있다. 1970년 방콕 대회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룬 축구와 농구의 동반 우승이다. 축구는 1970년 대회에서 버마(오늘날의 미얀마)와, 1978년 방콕 대회에서 북한과 공동 우승했다. 1986년 서울 대회에서 처음으로 단독 우승한 뒤로는 금메달과 인연을 맺지 못하고 있다. 홈에서 열린 1986년 서울 대회에서는 농구가 중국에 밀려 은메달, 2002년 부산 대회에서는 축구가 준결승에서 이란과 0-0으로 비긴 뒤 승부차기에서 3-5로 져 결승 진출에 실패하고 동메달을 땄다.

그렇다면 44년 전인 1970년 대회에서는 어떻게 축구와 농구가 함께 금메달의 기쁨을 누렸을까. 잠시 시간 여행을 떠나 보자.

이광종 감독과 축구대표팀[사진=아시아경제 DB]

이광종 감독과 축구대표팀[사진=아시아경제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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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와 농구는 그 무렵 아시안게임 첫 우승에 대한 나름 열망이 있었고 경기력도 우승권에 근접해 있었다. 축구는 1956년(홍콩), 1960년 아시아선수권대회(서울)에서 2연속 우승하며 아시아 정상의 실력을 자랑했지만 이후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1966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는 태국에 0-3, 버마에 0-1로 져 조별 리그에서 탈락하는 수모도 당했다. 요즘 같으면 대한축구협회가 홍역을 치를 일이었다. 그해에는 북한이 8강에 오른 잉글랜드 월드컵 지역 예선에 북한의 전력을 의식해 출전을 포기하는 일까지 있었다. 그런 가운데 대한축구협회는 양지(중앙정보부)를 중심으로 1970년 멕시코 월드컵 본선 진출을 목표로 전력을 다졌다. 멕시코행 비행기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축구대표팀 전력은 알게 모르게 향상돼 있었다. 그런 가운데 맞이한 대회가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이었다.

대회 직전에 열린 제3회 킹스컵에서 우승하며 기세를 올린 한국은 1차 조별리그 C조 첫 경기에서 난적 이란을 1-0으로 꺾은 뒤 인도네시아와 0-0으로 비겨 2차 조별리그에 올랐다. 2차 리그 첫 상대는 홈그라운드의 태국이었다. 그 무렵 태국 원정은 거친 응원으로 선수들에게 악몽이었다. 선수단은 김호, 박이천, 정강지 등이 관중석에서 날아 온 빈병과 돌에 맞아 그라운드에 쓰러지기도 한 가운데 2-1로 이겼다. 두 번째 경기에서 버마에 0-1로 졌지만 조 2위로 준결승에 올라 라이벌 일본과 맞붙었다. 전해인 1969년 멕시코 월드컵 지역 예선에서 1승1무(2-0 2-2)로 앞섰던 한국은 연장 접전 끝에 2-1로 이겨 대망의 결승전에 올랐고, 버마와 다시 만나 0-0으로 비기면서 대회 출전 사상 첫 우승을 거뒀다.

농구는 전해인 1969년 아시아선수권대회(태국)에서 처음 우승한 여세를 몰아 1970년 세계선수권대회(유고슬라비아)에서 11위에 오르는 등 전력이 급상승하고 있었다. 한국 남자 농구의 역대 세계선수권대회 최고 성적이다. 한국은 조별리그에서 이란을 110-77, 홍콩을 116-51로 연파한 데 이어 필리핀을 79-77로 따돌리고 조 1위로 6개국이 겨루는 결승리그에 올랐다. 한국은 결승 리그 첫 경기에서 필리핀에 65-70으로 잡혔으나 마지막 경기에서 이스라엘을 81-67로 물리쳐 4승 1패로 이스라엘과 타이를 이룬 뒤 승자승으로 우승의 영광을 안았다. 일본이 3위, 자유중국(오늘날의 대만)이 4위, 필리핀이 5위, 인도가 6위, 이란이 7위, 태국이 8위 등이었다. 오늘날의 아시아 농구 판도와는 꽤 다르다. 이스라엘은 1981년 아시아경기연맹(AGF)의 후신인 OCA에서 쿠웨이트 등 서아시아 나라들에 의해 제명되기 전까지 아시아 지역의 각종 대회에 출전했다. 그리고 1994년 유럽올림픽위원회(EOC)에 가맹하면서 활동 무대를 유럽으로 완전히 옮긴다.

왼쪽부터 김태술, 오세근, 조성민[사진=김현민 기자]

왼쪽부터 김태술, 오세근, 조성민[사진=김현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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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축구와 농구 선수들이 동반 금메달 기념 ‘술 대결’을 벌인 일은 이제 전설이 됐다.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전설이 재현되길 기대한다. 농구 결승 경기가 끝나는 10월 3일 밤이 ‘딱’이다. 축구는 10월 2일 결승 경기를 한다.

신명철 스포츠 칼럼니스트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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