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 5촌 조카며느리 안노길 할머니 별세
황해도가 고향인 할머니는 열일곱 살 되던 해 안 의사의 사촌 동생인 홍근(洪根)씨의 3남 무생(武生)씨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하지만 일제 패망을 앞둔 1944년, 일본 앞잡이들이 휘두른 몽둥이에 남편을 잃었다. 부부연을 맺은 지 14년 만이었다.
이듬해 조국엔 '해방의 봄'이 찾아왔지만 할머니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안 의사 추모사업을 펼치기로 작정한 곳이 중국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고인이 시시때때로 펼쳐들었던 태극기는 공산정권이 들어선 중국에선 적성 국가 깃발이었던 것이다. 또 당국이 금지한 로마카톨릭교회 신앙을 따른 것도 시비거리가 됐다. 이 때문에 고인은 반혁명분자로 낙인찍혀 40년간 옥살이를 했다. 생의 절반 가까이를 감옥에서 보낸 셈이다.
감옥에 있을 때도 고인의 안 의사 공적 알리기는 계속 됐다. 치마 실오라기를 풀어 태극기를 만들어 감옥에 걸고 독립군복과 모자를 만들어 입고 썼다. 개조 불능의 불순분자로 몰린 고인은 1972년 오지인 네이멍구(內蒙古)의 노동교화감옥 농장으로 이감돼 강제노역에 동원됐다. 그러다가 한국과 수교가 이뤄지면서 1998년에야 감옥에서 풀려났다.
2009년 10월엔 하얼빈역에서 열린 '안 의사 100주년 기념 손도장 찍기 행사'에 휠체어를 타고 참석하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고인은 한국 대학생들에게 "애국가를 불러 달라"고 부탁하고 애국가를 함께 불렀다.
외부의 탄압에도 꼿꼿이 자신의 신념을 지켰던 고인이었지만 노환으로 인한 건강 악화는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지난해 9월 이후 건강이 급격히 악화된 고인은 올해 들어서는 거동은 물론 말을 거의 하지 못했다. 지난 1월 하얼빈에 안 의사의 기념관이 열렸다는 반가운 소식에도 말 없이 고개만 떨구었다고 한다.
최 수녀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상처를 평생 가슴에 안고 살아온 할머니를 더 잘 보살펴 드렸어야 하는데 하는 후회가 남는다"면서 "할머니와 멀리서 할머니를 후원하며 정성을 보태주신 모든 분들을 위해 평생 기도하겠다"고 말했다. 고인은 20일 중국 지린성 창춘시 천주교 묘지에 안장될 예정이다.
김민영 기자 argus@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