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일으켜 세우는' 바다·산…바다백리길을 가다
[통영=아시아경제 정종오 기자]바다와 산 사이, 산책길이 조용히 반긴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산에서 내려오는 바람이 서로 부딪힌다. 샛길에 잠시 바닷바람과 산바람이 뒤엉킨다. 손을 굳게 잡은 가족, 나란히 걷는 연인, 하얀 머릿결을 날리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느리게 걷는 노부부. 그들 등 뒤로 푸른 파도와 초록 산이 그림자가 돼 따라붙는다.
한려해상 바다백리길은 '산책하는 이들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경남 통영대교를 지나면 바로 만날 수 있는 미륵도 달아길에서 시작된다. 이어 한산도 역사길→비진도 산호길→연대도 지겟길→매물도 해품길→소매물도 등대길에 이르는 총 42.1㎞에 이르는 트레킹 코스가 '바다백리길'이다. 6개 섬을 묶어 만들었다.
그중 소매물도 등대길 탐방에 나섰다. 지난 11일 아침 7시. 살며시 들려오는 파도소리에 눈을 떴다. 바다가 눈 속으로 들어왔다. 숙소에서 내려다보이는 통영 앞바다는 섬들의 천국이었다. 점점이 흩뿌려져 있는 섬들은 잡힐 듯 말 듯 자리 잡고 있었다.
떠남은 낯익은 것과 잠시 이별하고 낯선 것과 만나는 시간이다. 여행의 즐거움은 낯익은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기대감으로 시작하게 마련이다. 통영여객터미널에서 소매물도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배가 고동을 울리며 바다로 향하자 제일 먼저 반기는 것은 갈매기 무리였다.
배가 이동하는 속도를 따라 뒤꽁무니를 바짝 쫓아온다. 몇몇 승객들이 이들의 모습이 귀여운지 과자를 던져준다. 과자가 바닷물에 닿기 전에 냉큼 부리로 받아먹는 녀석들의 묘기가 예사롭지 않다. 이런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수없이 드나들었던 여객선에서 사람들이 이들을 길들였지 않았을까 싶다. 저러다 바다 고기 먹는 것은 잊고 과자 맛에만 빠지지 않을까. 야생을 잊는 순간, 자신들이 포기해야 할 것이 많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을까. 울음소리만은 잊지 않아 다행이다 싶었다.
배는 조용한 바다 위를 1시간 남짓 달려 소매물도 선착장에 도착했다. 선착장 한 귀퉁이에 할머니들이 좌판을 벌여놓고 소라, 멍게, 굴, 해삼 등을 팔고 있었다. "아이구, 온다고 고생했는디, 여그 앉아서 회 한 사라 들고 가소! 싱싱하다 아이가"라며 호객 행위가 이뤄진다. 등대길 갔다가 내려오면서 먹겠다고 하는데도 막무가내이다. 싫지 않은 호객 행위이다. 할머니들의 안타까운 손을 뒤로하고-내려오면 반드시 먹겠다는 약속을 한 채-낯선 기대감 속으로 걸어들어 갔다.
소매물도 등대길은 총 3.1㎞ 거리로 약 2시간 남짓 발품을 팔면 된다. 선착장에서 시작해 소매물도에서 가장 높은(?) 무려 해발 152m의 망태봉 정상에 올라 등대섬으로 이어지는 트레킹 코스이다. 여섯 살짜리 어린아이도 힘들지 않게 오를 수 있는 길이다. 편안한, 발이 즐거운 산책길 정도였다.
그래서일까. 등산화를 신지 않고 구두를 신은 사람, 정장을 입은 사람도 너끈히 오르고 있었다. 선착장에서 망태봉까지 쉬지 않고 오르면 30분이면 도착했다. 망태봉 정상에 서면 사방으로 바다가 펼쳐진다. 망태봉에서 내려다보이는 등대섬은 저 멀리 아득히 조그맣게 보였다. 정상에 도착하니 일찍 오른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거나 아득히 눈에 들어오는 한려해상의 수많은 섬들의 향연을 조용히 즐기고 있었다. 세찬 바람에 머릿결이 이리저리 흩어졌다.
그중 젊은 한 연인 커플이 눈에 들어왔다. 나란히 서서 바다를 내려다보는 이들은 서로 한쪽 귀에 이어폰을 나눠 낀 채 침묵의 공간에 서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이 이들의 머리카락을 휘날렸지만 이들은 거친 바람에 모든 것을 맡기고 서 있었다. 그렇게 몇 분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이어폰을 빼고 등대섬을 향해 내려갈 차비를 했다.
기자의 오지랖 넓은 근성이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그들에게 다가가 "어떠세요? 힘들지는 않아요? 망태봉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어떻습니까?" 산 정상에 서면 모두 부드러워지고 아름다워진다고 했던가. 남을 위하는 마음의 자세가 생긴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들은 내 질문에 웃으며 "힘들지는 않고요. 참 좋아요. 저기 멀리 보이는 작고 작은 섬들도, 저기 지나가는 손톱만 한 유람선의 모습도…"라며 기분 좋은 울림의 대답이 돌아왔다.
산 정상에서 노래를 듣고 있었던 것 같았는데 무슨 노래냐고 오지랖 넓게 묻고 말았다. 그랬더니 연인 중 여성이 "유레이즈미업(You raise me up)이라는 노래인데요, 여기서 들으니 더 좋은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머릿속으로 가사가 스쳐 지나간다.
"내가 힘들고, 고난에 처했을 때/마음이 무거울 때/ 당신은 나를 일으켜 주었고 나는 정상에 설 수 있었어요/당신이 나를 일으켜 주었기에 거친 바다도 건너고/당신의 어깨에 기대 있으면 나는 언제나 힘을 얻어요/당신이 나를 일으켜 주었기에 나는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었습니다(When I am down/.../When troubles come and my heart burdened be/...You raise me up/ so I can stand on mountains/You raise me up, to walk on stormy seas/I am strong when I am on your shoulders/You raise me up/to more than I can be)"
두 연인의 이름과 나이, 주소를 물을 새도 없이 그들은 등대섬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대답한 이들의 실명이 필요했지만 아무렴 어떤가. 이곳 망태봉에서 노래를 들으면 그 어떤 노래도 마음 속 울림으로 남고, 길고 깊은 추억으로 간직될 터인데.
그들이 떠난 자리에 홀로 서서 먼바다를 바라보았다. "당신의 어깨에 기대면 나는 힘을 얻는" 그런 '당신'이 우리에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힘든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나를 일으켜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축복이다. 망태봉에서 출발했던 연인의 모습이 저 아래로 조그맣게 사라져 갔다. 다정히 손잡고 걸어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행복한 웃음이 입가에 잔잔히 퍼진다.
굳이 사람이 아니더라도 불어오는 바람이, 멀리 보이는 고즈넉한 풍경이, 이름 모를 한 송이 꽃이 '나를 일으켜 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빠져본다.
망태봉을 지나 연인들과 많은 가족들이 지나갔을 길을 따라 등대섬으로 향했다. 망태봉에서 바라보는 등대섬과 달리 다가갈수록 섬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이날은 물이 빠지지 않아 열목개를 지날 수 없었다. 열목개는 소매물도와 등대섬을 이어주는 '모세의 기적'을 일으키는 길이다. 하루에 두 번 정도 물이 빠질 때 오고가는 길이 열리는데 이날은 바람이 강해 끝내 길은 열리지 않았다.
그렇게 갔던 길을 되짚어 소매물도 선착장으로 돌아왔다. 좌판을 벌이고 있던 할머니들의 눈매는 매서웠다. 내 얼굴을 정확히 기억하고 "잘 갔다 왔는교? 인자 일루 와서 회 한 사라 잡숫고 가소?"라고 팔을 잡아끌었다. 얼굴에서 땀이 졸졸 흘러내리고 할머니의 손길이 기분 나쁘지 않다.
할머니의 정겨운 손길에 이끌려 소라, 굴, 멍게, 해삼으로 바다냄새 물씬 풍기는 회 한 사라(접시)를 앞에 두고 소매물도의 맛에 빠져본다. 싱싱한 맛이 혀끝에 감기면서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가 술잔이 돼 귀에 부서졌다. 저 멀리 우리를 다시 통영으로 데려갈 여객선이 조용히 바닷길을 달려오고 있었다.
◆한려해상 바다백리길 가는 방법=경남 통영여객터미널에 도착하면 곳곳으로 가는 여객선이 있다. 터미널(1666-0960, http://island.haewoon.co.kr)에 전화하면 여객선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6개 섬에 이르는 40㎞가 넘는 트레킹 코스이기 때문에 하루에 모두 갈 수는 없다. 두 개 섬을 묶어 계획을 짜면 훨씬 편안한 여행길이 된다.
윤용환 한려해상동부사무소장은 "각 구간별 거리에 따라 걸리는 시간이 다르지만 하루 최대 2개 섬을 둘러볼 수 있다"며 "통영항을 기점으로 오가는 섬들의 여객선 운항정보를 사전에 알아둬야 한다"고 말했다
통영=글·사진 정종오 기자 ikokid@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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