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잔인한 금융시스템의 공범이었다"…김용범 靑 정책실장의 고백
"가장 절박한 사람이 가장 비싼 이자…개인 아닌 구조의 문제"
李대통령 문제의식엔 "신용의 기본 모르는 질문이라 생각" 고백
"신용점수는 과거의 잔상…금융이 만든 보이지 않는 계급장"
"위험 무시하자는 것 아냐…공정하고 정교한지 물어야"
"2008년 금융위기에도 금융은 근본적 성찰 없어…더욱 폐쇄적"
자타 공인 경제·금융 정책 전문가인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이 스스로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금융의 신용평가·금리 구조를 두고 공개적으로 성찰의 메시지를 내놨다. 기획재정부 1차관과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낸 그가 개인의 신용등급을 중심으로 일률적으로 금리를 책정해온 금융 시스템의 작동 원리를 되짚으며 "나는 이 잔인한 시스템을 설계하고, 작동시키고, 정당화해 온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명백한 공범"이라고 고백한 것. 그러면서 그는 이런 고백은 처절한 성찰을 통해 어떻게든 바꿔보자는 몸부림이라고 했다.
김용범 정책실장이 27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이날 열린 이재명 대통령과 데미스 허사비스 구글 딥마인드 최고경영자(CEO) 면담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우창 국가AI정책비서관, 김 정책실장, 박지연 수어통역사. 2026.4.27 연합뉴스
"이 글은 그 비겁했던 자각에서 시작된다"고 운을 뗀 김 실장은 1일 페이스북에 '한국 금융은 왜 이토록 잔인한가: 신용등급이라는 불완전한 과학'이라는 글에서 "왜 가장 여유 있는 사람은 가장 낮은 금리를 누리고, 가장 절박한 사람은 가장 비싼 돈을 써야 하는가"라며 "이 질문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 지적은 이재명 대통령이 여러 차례 반복해온 금융시스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이자 질문이었다. 이 대통령은 수석·보좌관 회의, 국무회의, 타운홀 미팅 등을 통해 '가장 여유 있는 사람이 낮은 금리를 누리고, 가장 절박한 사람이 가장 비싼 이자를 내야 하는가. 거꾸로 되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취지의 질문을 던졌다.
이에 김 실장은 처음에는 이런 이 대통령의 질문에 "신용의 기본을 모르는 질문"으로 받아들였다고 고백했다. 그는 "돈을 갚을 능력이 증명된 사람에게 낮은 금리를 주는 것, 그것이 금융의 ABC이자 흔들리지 않는 질서라고 믿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시간이 지나며 이 질문이 "우리가 당연시해 온 그 전제의 심장을 찌르는 질문"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금융은 도대체 누구를 지키고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잣대로 사람의 가치를 매기고 있는가"라고 물었다고 회고했다.
"금융의 신용평가 제도 근본적 한계…금융이 설계한 보이지 않는 계급장"
이번 글에서 김 실장은 신용평가 제도의 한계를 집중적으로 짚었다. 그는 금융의 출발은 "남는 돈이 있고, 필요한 돈이 있는 것"이며, 금융은 그 간극을 잇는 다리라고 설명했다. 돈을 빌려주는 쪽의 핵심 질문도 본래는 "이 사람은 돈을 돌려줄 사람인가"라는 단순한 문제였다고 했다.
그러나 담보 없이 사람의 신용만 남았을 때 금융은 사람의 삶을 분석하기 시작한다고 지적했다. 소득, 부채, 직업, 금융 거래 이력, 과거 연체 여부 등을 따지고, 그 복잡한 생애를 하나의 숫자로 압축한 결과물이 신용점수라는 것이다. 김 실장은 "이 발명품은 제법 근사해 보였다"며 "불투명한 미래를 수치로 환산하는 시도라는 점에서 합리적이고, 실제로도 점수가 높은 사람이 대체로 돈을 잘 갚는다"고 했다.
김 실장은 금융시스템의 비극은 그 지점에서 싹튼다고 강조했다. 그는 "신용점수가 상환 능력을 측정한다는 말은 절반만 맞다"며 "등급은 철저히 과거만 본다"고 했다. 이어 "안정적인 궤적을 그리며 살아온 삶은 우대하지만, 거친 풍랑을 견뎌온 삶은 가차 없이 깎아내린다"고 썼다. 이어 정규직과 자영업자의 차이, 금융 거래 기록이 부족한 사람들의 불리함, 실직·질병·이혼 같은 생애 변수 등을 예로 들며 "신용점수는 미래를 예측하지 않는다. 그저 정교하게 요약된 과거의 잔상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 숫자가 세상에서는 절대적인 신이 된다"며 "대출의 성패를 가르고, 금리의 높낮이를 정하고, 한 사람의 경제적 경로를 좌우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를 "점수가 아니라 구조이며, 금융이 설계한 보이지 않는 계급장"이라고 표현하면서 "금융시스템은 '평균의 정답'을 위해 개인의 억울함을 기꺼이 희생시킨다. 효율이라는 이름 아래, 한 사람의 사정 따위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라고 역설했다.
김 실장은 이러한 성찰이 단순히 금리를 낮춰주자는 주장은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그는 "이것은 동정론이 아니며, 위험을 무시하자는 무책임한 이야기도 아니다"라며 "위험은 실재하고 그에 따른 가격표는 필요하다"고 했다. 다만 "진짜 문제는 위험의 분류가 정말 공정하고 정교한가에 있다"며 "더 위험한 인간이라서 높은 금리를 내는 게 아니다. 우리가 만든 시스템이 '위험한 집단'으로 묶어버렸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2008년 금융위기에도 금융은 근본적 성찰 없어"…폐쇄성만 쌓아, 양극화 여전
금융 모델의 정교화가 오히려 시스템의 위험을 키울 수 있다고도 지적했다. 김 실장은 "모델이 정교해질수록 시스템은 더 위태로워진다"며 "숫자를 맹신하게 된 금융은 더 과감하게 돈을 빌려주고, 더 높은 레버리지를 쌓아 올린다"고 했다.
그러면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예로 들었다. 금융이 리스크를 잘게 쪼개고 섞으면 안전해질 것이라고 믿었지만, 집값이 일제히 하락하자 모델은 무너졌다는 것이다. 김 실장은 "재앙을 만든 건 개별적인 인간들이 아니었다"며 "그들의 신용을 재료 삼아 탐욕의 탑을 쌓은 구조였다"고 했다.
금융위기 이후에도 금융권이 근본적인 성찰보다 더 높은 장벽을 쌓았다고 비판했다. 그는 "미증유의 충격을 겪었으니 근본적인 성찰과 혁신이 뒤따를 줄 알았지만, 금융은 오히려 더 엄격하고 폐쇄적인 성을 쌓았다"고 했다. 이어 "서류는 늘었고, 점수는 더 촘촘해졌으며, 문턱은 더 높아졌다"며 "구조의 실패를 개인의 책임으로 치환하는 방향 전환이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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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금융의 양극화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김 실장은 "성 안의 사람들은 더 공고한 보호를 받았지만, 변방의 사람들은 안으로 들어올 통로를 찾지 못한 채 겉돌고 있다"며 "누가 위기를 만들었는가. 그런데 왜 개인들만이 그 책임을 떠안고 시장 밖으로 밀려나는가"라고 했다. 김 실장은 이 물음을 시작으로 '신용이라는 기준과 시장이 작동하는 방식', '금융 구조를 다시 설계할 가능성' 등을 다룬 글을 공유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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