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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6장 봄비 내리는 아침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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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6장 봄비 내리는 아침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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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연이 시험지 받아놓은 학생처럼 ‘봄비’라는 제목의 시를 쓰고 있는 동안, 하림은 다시 배문자로부터 받은 숙제 <전쟁이 인간의 진화에 미치는 영향> 만화 대본 작업을 위해 노트북의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막연했던 줄거리가 이상하게 아까 소연이랑 이야기 하는 동안에 조금씩 잡혀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야기는 로망이다. 로망은 어디까지나 남과 여의 사랑이 중심이다. 그러니까 청동기 시대 모헨조다로의 아름다운 눈 먼 가수, 아직 이름은 정해지지 않았지만, 그 여자 가수의 이야기가 이 만화의 초반을 장식하게 될 것이다. 하림은 그녀가 살았던 모헨조다로를 통해 아직 인류가 야만의 경험 이전 평화로웠던 선사시대 이상사회를 그려보고 싶었다. 그리고 곧 불어닥칠 피비린내 나는 이야기는 인류가 이른바 역사시대라고 부르는 것이 될 것이었다. 여자의 아이와 그 아이의 아이, 또 그 아이의 아이는 광기와 폭력의 시기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역사는 진보하고 있는가? 진화와 진보는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인간의 세계란 야만에서 문명의 빛 속으로 가고 있는가, 아니면 신의 세계에서 하강하여 광기와 폭력의 짐승들의 세계로 가고 있는가? 하림은 그 파노라마를 그 눈 먼 모헨조다로 여자 가수의 가계를 통해 장대하게 펼쳐 보이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시작했지만 막상, 시작하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자기가 무슨 문화 인류학자도 아니고, 사회학자도 아니면서 실없이 거창한 설계도를 펼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제 파악을 해야 했다. 만화는 그저 만화일 뿐이다. 재미만 있으면 된다. 철학은 장식이고, 개똥이다. 거창하게 떠든다고 하여 봐 줄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요즘 시대엔 떠드는 놈만 바보다. 그저 조용히, 조용히 사는 게 장땡이다. 그리고 보면 허무주의자도 하나 쯤 들어가는 게 좋겠다. 똥철이 같이 망명정부를 꿈꾸는 친구는 또 어떨까.
하림이 그런 쓸모없는 생각을 굴리며 대본의 줄거리를 잡고 낑낑거리고 있는 동안, 소연은 소연대로 하림이 준 종이 위에 뭘 쓸까, 하고 볼펜만 손가락 사이에 끼워 넣고 돌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에이, 힘들어. 나 누워서 쓸래.”
하고 하림이 펴놓은 이불 쪽으로 가더니 벌렁 베개에 턱을 괴고 누웠다.
“왜.....? 잘 안 돼?”
하림이 그런 소연을 보고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응. 아무 생각도 안 나요.”
“힘들지? 힘들지 않으면 누구나 시인이 되게?”
하림이 사돈 남 말 하듯이 웃으면서 말했다.
“생각 안 나면 저어기 오빠가 가져온 책 중에 시집이 몇 권 있을거야. 거기서 아무거나 골라서 베껴 써봐. 천천히 베껴 쓰면서 마음 속으로 그 시인의 말과 내용을 음미하면 자기도 모르게 시상이 떠오르는 수가 있거든. 어떤 유명한 시인은 그렇게 남의 시집 백 권을 다 베껴 쓰고 나니까 비로소 시가 보이더란 말도 있어.”
“정말....?”
“응. 가수가 되기 전에 먼저 남의 노래를 듣고 즐길 줄부터 알아야하는 것처럼 말이야.”

“알았어요!”
소연이 명랑하게 대답하고는 일어나 하림이 가져온 책을 뒤적거리더니 시집을 몇 권 들고 다시 턱을 괴고 누웠다. 그런 모습이 귀여웠다. 누가 보면 오해하기 딱이겠지만 혼자 있던 방에 소연이라도 와서 같이 있어주는 게 고마웠다. 하긴 그녀도 이곳에서 어지간히 외로웠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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