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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 - 4장 낯선 사람들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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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 - 4장 낯선 사람들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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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사촌언니가 갖다 주라며 들고 왔던 토란국도 순전히 하소연이 자기 발상이었던 셈이다. 그걸 하림은 아침에 물 길러 갔다가 그녀의 풍맞은 사촌언니라는 여자를 보고서야 알았다. 토란국 어쩌구, 고맙다고 하자 그녀의 사촌언니가 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았을 때 알았던 것이다.
‘깜찍한 것 같으니....’
하림의 입가에 자기도 모르게 미소가 떠올랐다. 아무려면 그녀의 사촌언니가 그새 자길 알 리가 없었고, 알 리 없는 사람에게 뭐가 이뻐서 토란국을 보내주었을 리가 없었다. 그걸 핑계로 소연이 자기를 보러 온 것일 터였다. 아마 그 나이다운 호기심과 약간의 호감이 발동한 것인지도 몰랐다. 아니면 그녀 역시 이 시골 바닥에서 심심해빠져 있다가 그럭저럭 오빠라고 부를만한 나이의 사람이 나타났으니 내심 반가운 마음이 들었을 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하림으로서도 나쁘지는 않았다.
옛말에 여자와 접시는 내놓으면 깨진다는 말이 있지만 남자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었다. 아니 어떻게 보자면 남자야말로 접시보다 더 잘 깨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어저께만 해도 혜경이랑 잠을 자고 혜경이 없으면 죽을 것만 같은 자기였는데, 그녀보다 훨씬 어리고 발랄한 소연을 보자 어느새 살랑거리는 자기를 보면 꼭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의 마음이 갈대라면 남자의 마음은 갈대를 흔들며 돌아다니는 바람과도 같은 것일 터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하림은 괜히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벼락을 맞아도 열두번을 맞을 상상을 다 하고....’
그리고 괜히 혜경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 한편 혜경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날 그녀는 자기랑 자면서 죽은 남편, 은하 아버지, 양태수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꺼내놓았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변치않는 믿음과 사랑에 대해서도 고백을 했다.
‘나도 그이가 문제가 많았던 인간이란 건 알아. 하지만 내가 그이랑 결혼한 건 그냥 그이가 막무가내였거나 내가 철이 없어서 저지른 일만은 아니었어. 솔직히 말해 그인 이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 많았어. 흔히들 아웃사이드라 불리는 그런 류의 사람들처럼 말이야.’
그리고 또 말했다.
‘세상엔 그런 사람들이 있잖아? 이 세상의 질서에 튜닝되기 싫어 거짓 위악을 저지르는 인간들 말이야. 알고 보면 한없이 약하고 여린데도 불구하고, 겉으론 마치 악의 화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껄떡거리고 다니는 사람들.... 학교에선 문제아라 불리고 사회에선 비적응자, 낙오자라고 불리는 사람들 말이야. 은하 아빠도 어쩌면 그런 사람이었는지 몰라.’

그게 어쩌면 혜경의 솔직한 마음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자기가 진정 혜경을 사랑한다면 혜경의 그런 마음과 그런 추억까지도 모두 감싸 안아야 할 것이었다. 태수형이 남기고 간 그의 딸 은하를 안아주었던 것처럼.... 사랑이란 그렇게 서로의 상처를 안아주는 것이다.
하지만 하림은 아직 그럴 준비가 되어 있질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해 그럴 자신이 없었다. 어쩌면 그에겐 여전히 곱슬머리 짱에 대한 두려움와 질투의 감정이 어두운 그림자처럼 질기게 남아있는지도 몰랐다. 그런 감정이 자기에게 남아 있는 한 그는 결코 혜경의 전부를 가질 수 없을 것이었고, 혜경이 역시 그를 전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었다. 어쩌면 혜경은 그것을 알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날 자기에게 태수형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았는지 몰랐다. 하지만 하림은 그녀의 고백을 들으며 내내 아프기만 했을 뿐이었다.

‘사랑이란 뭔가...?’
하림은 오랜 수수께끼처럼 머릿속에 그 질문을 떠올리며 혼자 밥을 먹었다.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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