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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女星⑬]올 블랙의 그녀, 유통가 脈을 짚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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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女星⑬]올 블랙의 그녀, 유통가 脈을 짚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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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김현정 기자] 대한민국 사회에서 '유리 천장'이 서서히 깨지고 있다. '여성 임원 1세대' 시대가 태동하고 있다. 1980년대 입사한 신입 공채들이 '별'을 달기 시작했다. 이른바 '여풍(女風) 시대'의 개막이다.

미국의 유명한 심리학자 에이드리엔 멘델은 <유능한 여자는 많은데 왜 성공한 여자는 없을까>라는 저서에서 직장 생활에는 여자가 모르는 불문율이 분명 존재한다고 말한다. 멘델은 유능한 여성은 많은데 성공하는 여성이 적은 이유로 "여성이 목표지향적인 남성 사회의 룰을 모른 채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으려는 관계지향적 태도를 지녔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그는 비즈니스라는 게임에서 이기려면 유능한 척, 강한 척하고 재미가 없어도 중간에 그만두지 말고, 감정을 개입시키지 말고, 필요하면 싸우고, 팀의 일원임을 명심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러나 최근 사회분위기가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공채로 입사해 조직에서 '별'을 다는 여성임원들이 눈에 띄게 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임원 1세대라는 점에서 이들이 가지는 상징성은 크다. 말 그대로 유리 천장에 금이 가기 시작한 신호탄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한 조직에서 오랜 시간 몸담으며 남성과 당당히 경쟁해 살아남고 인정을 받으며 승승장구하는 여성(女星)들. 유리 천장을 과감히 깨트린 여성 임원의 눈으로 바라 본 세상은 어떠할까.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겪은 파란만장한 그녀들의 인생 스토리. 20~30대 새내기 여성 직장인 후배들에게 들려주고픈 대한민국 여성 임원들의 생생한 경험담을 전한다.<편집자주>


[파워女星 임원 꿰찬 1세대 그녀들의 Success Diary]
⑬김정선 맥 코리아 제너럴매니저(상무)
유통가 남자들에게 많이 져줬죠, 그게 내가 이기는 '밀당 비법'
어려보이는 외모 탓에 리테일러 마저 "어디서 왔어"
반말과 압박, 처음엔 상처
미운정 고운정 들며 신뢰 쌓기.. 이젠 '이기기 위한 패배' 터득


인터뷰를 위해 도착한 서울 강남역 사무실은 온통 블랙, 그리고 여성 뿐이었다. 세련되고 늘씬한 미녀들 사이를 헤치며 지나가니 같은 여성이지만 숨이 막힌다. 한켠에 투박한 사무실이 눈에 띄고, 조심스레 문을 연 그곳에는 역시나 머리부터 발끝까지 블랙 정장으로 멋을 낸 김정선 맥 코리아(MAC Korea) 상무가 기자를 반겼다.

맥은 에스티로더, 바비브라운, 크리니크 등 30여개의 탑 브랜드를 운영하는 미국 에스티로더 그룹에 속해 있다. 직장여성에게 익숙한 메이크업 전문 브랜드로, 아이라인으로 눈꼬리 좀 뽑는다는 '고수'들이 선호하는 시크함ㆍ세련됨의 상징이기도 하다. 전 직원의 드레스 코드인 '블랙(맥 오피스 및 매장 직원들은 모두 머리부터 발끝까지 블랙의상을 입는다)'도 같은 맥락이다. 그런 의미에서 맥의 국내 사업을 총괄하는 제너럴매니저(GM), 김 상무는 회사의 정체성을 온몸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딱딱한 임원 직함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젊고 세련됐지만, 외모에 대한 칭찬에는 손사레부터 친다.

"우리나라 유통시장처럼 '총성없는 전쟁터'에서 '동안' '미인', 이런 칭찬은 아무 의미 없습니다. 존재감ㆍ카리스마같은 반대의 이미지들이 오히려 무기가 되죠."

사연이 많다는 듯 비장한 멘트를 날리는 김 상무의 시선은 기자를 향했다가 책상 위에 한뼘이나 쌓인 결재서류를 능숙하게 훑었다. 첫 만남에서의 구태의연한 인삿말이 오가는 5분여가 끝난 뒤, 김 상무가 선수를 친다.

"요샌 한가지 일만 하면 너무 노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제 인터뷰 시작하시죠."

◆'일 잘한다'의 정의는 계속 바뀐다 = 김 상무가 맥의 임원자리에 오른건 서른 여섯, 지금으로부터 6년 전 일이었다. 유니레버 코리아에서 폰즈ㆍ도브 등 유명 브랜드의 마케팅을 7년간 맡아오다 2002년 맥으로 자리를 옮겼고 5년 만에 '이사' 직함을 달았다. 2009년엔 GM으로 승진해, 마케팅, 홍보, 직원교육, 영업, 수익관리 등을 총괄하는 그룹의 소(小)사장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다른 무엇보다도, 일을 잘했기 때문이죠." 임원 된 비결은 명쾌했다. 하지만 스스로 인정한 '업무능력'의 의미는 단순한 게 아니었다. 김 상무에 따르면, 일 잘하는 여성의 핵심 키워드는 나이나 직함에 따라 바뀐다. 한결같은 모습으로 일하는 건 그래서 최악이다. 요구되는 능력과 기대치는 수시로 변하는데, 일관된 태도로 일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그가 말하는 20대 여성의 핵심 키워드는 '프로젝트(project)'다. 눈앞에 주어진 일들을 완성도 있게 수행하라는 것. 묵묵함, 열정, 희생 같은 모습도 보여준다면, 가산점을 얻을 수 있다. 30대 여성의 경우 '매니지먼트(management)'다. 입사 후 5년여가 지나 관리해야하는 일과 직원이 생기고, 상사의 신뢰가 두터워지는 시기다. 좀 더 복잡하게 얽힌 조직 속으로 능숙하게 뛰어드는 게 관건이다. 40대 여성의 키워드는 '멘토(mentor)'다. 특히 '덕(德)'이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 직장여성들이 바로 이 과정에 약한데, 본인의 성과를 내는데 집착하지 말고, 후배들의 조력자가 돼야한다는 게 김 상무의 조언이다.

"주어진 임무를 누구보다 열심히 하는 건 직장인의 기본입니다. 그러나 40대 이상의 임원이 실무의 끝에서 끝까지 모두 간여하고자 한다면, 좋은 상사가 아닙니다. 일을 잘하는 것도 아니예요. 적절히 직원에게 맡기고, 도와주고, 관계를 맺는 게 도리죠."

유행이 빠르게 변하는 코스메틱 업계에서 이직도 잦았을 법 하지만, 외의로 김 상무는 한 곳에 오래 머물렀다. 유니레버 코리아에서 7년, 이곳 맥에서는 11년을 일했다. 그는 5년 뒤 내 모습이 그려지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라도 일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실제 김 상무가 맥으로 자리를 옮겼을 당시 처음 조건은 '계약직'이었다. 능력은 충분히 인정받았지만 본사의 승인이 나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자리에서 내가 뭘 배우느냐'예요. 그 다음이 타이틀이고, 그 다음이 보수(돈)입니다. 지금 자리도 아직까지 배울게 너무 많아서, 한동안 이직 걱정은 없겠네요."

◆'무서운' 맥 언니들, 프로정신으로 무장하다 = 맥은 우리나라에서 지난 10여년 간 고속성장했다. 1999년 서울 압구정 스토어를 첫 매장으로 시작해, 현재는 전국 백화점에 46개 매장을 보유하고 있다. 매년 30%에 가까운 매출성장률을 기록했고, 올해도 1000억원 매출이 목표다.

성장의 중심에는 물론 김정선 상무가 있었다. 본사 오피스를 포함해 그가 통솔해야 하는 직원은 430여명에 달한다. 게다가 80% 이상이 20대~30대 젊은 여성 들이다. 혈기 왕성한 젊은, 언뜻 보기에도 기가 '세' 보이는 직원들의 리더는 쉬운자리가 아니다.

"소위 '맥 언니들(매장 직원)'은 무섭다는 고정관념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1박2일 워크샵에서 화장 지운 얼굴들을 보면 다들 아직 뽀얀 '애기'예요. 다만 모두 세긴 세죠. 성격이 거칠고 모났다는 게 아니라, 프로의식과 자존심이 강하다는 의미에서요."

'블랙'의 드레스코드와 짙은 스모키 화장, 굽 높이 10cm를 웃도는 킬힐은 맥 매장 직원들의 상징 같은 것이다. 굽 높은 신발이 쉽게 피곤해지고 건강에도 안 좋으니 낮은 신발을 신어보라는 충고도 해봤지만, 대부분이 거부한다고. 직원 스스로 단순한 '영업사원'이 아니라 '아티스트'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맥 직원들은 전문가로서 메이크업 스킬을 조언하고, 트렌드에 따라 고객을 리드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이 있어요. 그 고집을 꺾는다면 상처받을 거예요. 하지만 업무를 떠나면 다들 순수하고 가족적인 분위기라서 흔히 여성 조직에서 나타나는 '왕따' 문제같은건 고민할 필요도 없습니다."

젊은 직원들과 일하면서 김 상무가 항상 되뇌이는 게 있다. 바로 '유연함'이다.

"가끔 직원들을 보고 '나 땐 안 그랬는데..'하며 세대 차이를 느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장을 이끌어 갈 세대는 '우리'가 아닌 '저들' 이예요. 맥이 가장 주요 타깃으로 삼는 소비계층도 직원들의 나이와 맞물려요. 철학적인게 아니라 타성에 젖은 고집이 있다면, 스스로 빨리 꺾어버리고 어린 직원들의 아이디어나 관점을 따라가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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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유통시장은 총성없는 전쟁 = 얘기를 듣다보니 인터뷰 초반에 얘기했던 '동안ㆍ미인은 필요없다'는 발언의 배경이 궁금했다. 어리고 예쁘장한 얼굴 때문에 겪었던 억울함이 있는 게 분명하다.

그를 힘들게 했던 사건들은 2006년, 이사 직함을 달았던 첫 해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간 주로 사내에서 마케팅 업무를 했던 김 상무에게 관리자로서의 현장 교섭 업무는 생소했다. 회사 대표로 백화점 리테일러와 미팅하는 자리에서 "어디서 왔어?"하는 반말도 자주 들었다. 워낙 젊은 나이에 임원이 된 탓도 있지만, 상대적으로 어려보이는 외모가 독(毒)이었다. 교섭 대표자가 아닌 '젊은 여성'이라는 이미지를 씻기 위해서 남들보다 더 까탈스럽게도 굴어보고, 야박하게 행동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스트레스와 상처도 컸다. 그러나 진짜 교섭이란, 그런게 아니었다.

"항상 최고의 성과를 내고자 한다면 타협은 이미 물 건너 간 것이나 다름없어요. 이기기도, 또 지기도 하면서 이해득실을 주고받아야 신뢰가 쌓인다는 걸 알았죠. 그게 바로 유통가 남자들의 방식인데, 여자들은 이걸 잘 못해요. 지난번에 받은 만큼 이번에도 받아야 하고, 지거나 손해보면 안 되고. 미운정, 고운정 든다는 의미를 여자들도 알아야 합니다."

최근에는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다. 일단 들여만 놓으면 기대 이상의 매출을 내 주는 '맥' 매장을 유치하려는 리테일러들의 압박 때문이다. 그러나 본사의 매장 허가 조건은 무척이나 깐깐하다. 시장 성숙도를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사세확장을 한다면 소비가 둔화됐을때의 타격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란 판단에서다.

"매장 입점을 거절할 경우에 어떤 보복이 있을 수 있다는 식의 압박은 이제 일상적인 일이 됐습니다. 임원 초입에는 부들부들 떨고 스트레스에 제풀에 꺾인적도 많았지만, 지금은 소위 말하는 '밀당(밀고 당기는) 기술'이 생겼어요. 정신줄만 잘 붙잡고 겁먹지 않으면, 큰일 날 일은 없더라구요."

◆정색하는 딸 때문에 사표도 못내죠 = 이달 초 김 상무는 과로와 감기로 한바탕 앓아 누웠다. 이른 아침 출근은 안하고 부스스한 모습으로 집에 있는 그에게 중학교 1학년 큰 딸이 "왜 회사에 가지 않느냐"고 물었다. 김 상무가 농담삼아 '회사 그만뒀다'고 하자 딸은 사색이 됐다. 공부도 봐주고, 자주 놀아주겠다는 얘기도 안통했다.

"빨리 다시 회사 가. 엄마 회사에 나중에 나 들어가야 하니까, 그 때 까지는 다녀야 한단말이야!"

딸은 얼굴까지 벌게져서 눈을 흘겼다. 김 상무의 모습이 멋지다며, 엄마의 길을 따라 걷겠다는 아이다. 요구대로라면 앞으로 10년은 더 회사생활을 해야 하지만, 그 강요가 싫지만은 않다. 이제 초등학교 4학년인 둘째 아들도 마찬가지다. 일하는 엄마를 항상 자랑스럽게 여긴다. 가정과 일 사이에서 고민하는 후배들에게 김정선 상무는 자신의 얘길 하며 강조한다. 미안하다는 마음이나 부채의식은 버리라고. 힘든 상황을 완벽하게 극복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받아들이는 것도 필요하다고.

"자녀를 비롯한 가족들에게 '평범한 엄마'처럼 못해주는 데 대해서 너무 미안해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고민하고 안달하는 모습 말고, 실력있고 당당한 엄마의 모습이 필요합니다. 물론 전업주부의 삶도 훌륭하고 어느 게 더 낫다고 말할 수 없지만, 떠밀리듯 선택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여성 직장인, 또는 취업 준비생 후배들에게 스마트폰 앞에서 고개를 들으라고 조언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요즘 트렌드에 양보할 수 없는 건 바로 '얼굴을 보고 말하는' 소통방식이다.

"다들 스마트폰에 얼굴을 파묻고 사는데, 같이 일하는 동료나 가족과 얼굴을 직접 보고 말하는 횟수는 그만큼 줄어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오래됐으면서도 좋은 방식이예요. 긍정적인 에너지를 서로 주고받아야 신뢰도 생깁니다. 서로를 평가하는 상사와 후배 사이에, 이정도 감정교류도 없다면 너무 삭막하지 않겠어요."



글=김현정 기자 alphag@ 사진=양지웅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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