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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업성장史]⑥조선 최고 갑부 민영휘, 왜 商界에서 사라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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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박상하가 쓰는 재계 通史
-구한말 수조원대 자산 동일은행장 장남 민대식 향락 빠져 수익률 악화
-막내 민규식도 전환기시대 변화 못 읽고 실업가 방의석에게 밀려

현재 서울 종각이 있는 자리에 위치했던 동일은행 본점 건물.

현재 서울 종각이 있는 자리에 위치했던 동일은행 본점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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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경성의 거리는 아직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혼란과 암울함, 또 경이의 연속이었다. '저녁에 솟헤 너흘 쌀이 업서' 어쩔 수 없이 고리대금업자에게 돈을 빌려 썼다가 미처 갚지 못해 '쥐 잡는 약을 먹고 죽어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자그마치 지금 돈 10억여원에 달하는 유선형 자가용 승용차가 '아스팔트 우으로 쏘단이면서 시정인들의 말쑥말쑥한 옷자락에 몬지를 피우는' 시대였다.

그러나 이 시기 상계에 새로이 등장하게 된 상인 가운데는 뿌리 깊은 나무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전통적인 지주경영자들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 중 한 사람이 민영휘였다.
조선 최고 부자 민영휘

조선 최고 부자 민영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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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리 잡지 1930년 11월호에는 그에 대한 설명이 게재됐다.

'그는 조선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누구이냐 하면 어른이나 아해이나 이구동성으로 민혜당(민영휘를 일컬음)이라고 똑가티 대답을 한다'는 평안 감사와 시종원경경임내대신을 지낸 고관대작이었다.

또 '민씨는 재리(財利)에 선각자이엇든지 관직을 띄고서도 일면 축재에 조끔도 겨을리지 안코 각 방면으로 부력의 증대에 열중하엿섯다 한다. 그래서 오늘의 부명을 듯고 잇는 재물이란 것도 당시에 모은 것이다. 하여간 민씨는 치부에 잇서 남 유달리 물질이 잇섯든 것만은 사실이다(어떠한 방법으로 모앗든지). 조선에서 제일가는 부자라 하니 그 재산이 얼마나한 액에 달하는지 알고 십흔 생각이 날 것이다. 그러나 남의 재산을 너무 똑똑히 공개하는 것도 신용 관계가 될 뿐 아니라, 정확한 수자를 아러내기도 가장 난사이다. …그런데 민씨의 재산에 대하여 모처의 조사를 근거로 한 숫자가 알에와 갓다.
1. 농토 약 5만석지기 600∼700만원(지금 돈 약 7200억∼8400억원)
1. 소유 가옥 건물 기타 100만원 가량(지금 돈 약 1200억원)
1. 소유 주식 - 100만원 가량

이상의 숫자로 보아서 민씨의 재산이 1000만원(지금 돈 약 1조2000억원)이라고 세상에서 말하는 것이 그다지 오산이 업는 말이다….

민씨의 부력을 말할 때에는 세상 사람들이 민씨의 재산 출처를 가지고 시비를 말한다. 아닌 게 아니라 민씨의 재산에 대하야 출처를 차저서 말한다면 얼마든지 시비가 나올 것이다.

그러나 조선에는 조선 사람을 위하야 할 일이 너무도 만허 갈피를 차리기 어려웁다. 이런 때인 까닭에 사업가가 무엇보다도 필요한 터이다. ?(똥) 무든 돈이라고 내어바리고 깨끗한 돈만 찻고 잇슬 때인 조선 사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20세기 초 나라 안에서 가장 돈 많은 부자라 일컬어지던 민영휘는 과연 어떤 자산을 경영하고 있었던 것일까. 당시 그는 조선 최고의 땅 부자라는 5만석지기의 대규모 지주경영 외에도 70만원(지금 돈 약 840억원) 가량을 내놓아 설립한 휘문고등보통학교를 비롯해 150만원(약 1800억원)을 들여 인수한 조선한일은행, 경영난을 겪고 있던 조선제사회사를 인수해 매년 77만5000원(지금 돈 약 924억원)의 생산고를 올리고 있었다.

잡지에 따르면 이밖에도 민영휘는 '재리에 눈이 밝은 만큼 지금에도 남모르게 뒤에 안저서 식리(殖利)를 한다는 말이 잇다. 어떠한 방면이든지 리만 남을 것 가트면 뒤돈을 대어준다 한다. 종로 상계라든지 대금업이라든지 어떠한 방면을 불문하고 민씨와 관계를 매진 곳'이 상당히 많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민영휘는 그 때 이미 팔순의 고령이었다. 그런 만큼 뒷전에 물러나 있는 상태였으며 장성한 두 아들 민대식과 민규식이 고령의 아버지를 대신해 경영을 도맡고 있었다.

나라 안에서 가장 돈 많은 민영휘는 일찍이 영국 검교대학(케임브리지대학교) 경제학과를 유학하고 돌아온 자신의 장남 민대식에게 조선한일은행의 경영을 맡겼다. 민대식은 다시 호서은행을 인수 합병시켜 자본금 400만원(약 4800억원)의 동일은행으로 재출범시켰다. 당시 경성에서 조선인이 경영하는 은행으로는 민대식의 동일은행을 비롯해 박영철의 조선상업은행과 김연수의 해동은행 등 단 세 곳 뿐이었다.

막내아들 민규식에게는 자동차회사를 맡겼다. 당시 제물포 개항장을 통해 들어오기 시작한 자동차는 '번갯불을 먹으면서 쇳길을 달리는 검은 괴물' 기차 못지않게 경이로운 문명의 이기였다.
[한국기업성장史]⑥조선 최고 갑부 민영휘, 왜 商界에서 사라졌나 원본보기 아이콘

생전 보도 듣지도 못한 자동차가 얼마나 신기했든지 사람들은 '이것이 요술차냐, 신통차냐, 제갈공명의 목우유마 같은 것이냐'고 했다. 임종국의 '한국인의 생활과 풍속'을 보면 자동차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느낌이 어땠는지 보다 실감나게 그려진다.
'당시 자동차는 네모반듯한 차체에 휘장을 둘러친 것인데, 사람들은 그 포장 속에 번갯불이 들어있는가 보다고 수군거렸다. 올라타기만 하면 타 죽는다는 소문이 도는 판이었다. 타보고 싶기는 하고 죽기는 싫고…. 그런가하면 이게 무슨 짐승이냐고 하면서 막대기로 꾹꾹 찔러보는 사람조차 없지 않았다. …쇠당나귀가 산모퉁이라도 돌라치면 구경꾼들의 돌 세례를 맞는 것쯤은 예사였다.'

'쇠당나귀'라고 불렸던 자동차가 이 땅에 처음으로 등장한 건 1910년 전후였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경복궁의 궁중박물관에 가보면 전시돼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왕실용으로 영국제와 프랑스제 자동차 한 대씩을 들여왔다. 하지만 '궁궐에 이상한 소리를 내며 제 스스로 달려가는 괴물이 있다'라는 소문이 퍼진 걸 보면 궁궐 안에서만 맴돌 듯 자동차를 타지 않았나 추측이 된다.

그러나 궁궐 밖에서는 이미 총독부 고관을 비롯해 일본군 장성, 외교관, 선교사, 이완용과 박영효 등 친일 귀족들이 다투어 자동차를 사들였다. 이 밖에도 금광 부자인 박기효ㆍ 최창학, 친일 재벌 한상용, 대지주 배석환ㆍ김종성ㆍ백명권 등이 그 뒤를 이었다. 1919년경에는 경성 시가지를 누비는 자동차가 50대 안팎으로 늘어났다.
이런 가운데 1917년 민규식이 국내 최초로 택시회사를 경영하게 됐다. 그의 택시들이 경성 일대를 누비고 다녔음은 물론 멀리 충청도 충주까지 노선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민규식의 택시는 다른 교통 수단에 비해 요금이 너무 비싸 서민들은 감히 엄두조차 내질 못했다. 처음에 시간당 5원(약 60만원)을 받다가 점차 값을 내려 1928년경에는 4인 기준의 택시 요금이 1원(약 12만원)이었다. 승객 한 사람이 더 추가될 때마다 20전(약 2만4000원)을 더 받았고, 교외로 나가면 별도의 요금이 또 붙었다. 경성 시내를 한 바퀴 도는 데는 3원(약 42만원), 1시간 빌리는 데는 5원을 받았다.

그렇대도 택시 드라이브는 '시내 요정 가튼 데서 권태감을 늣기는' 일부 부유층에게는 신바람 나는 색다른 취미가 아닐 수 없었다. 또 이런 유행에 편승해서 민규식의 택시회사는 한때 순풍에 돛을 단 듯했다.

그러나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었다. 위풍당당하던 조선의 자동차왕 민규식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강력한 맞수 앞에 그만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함경도 북청의 시골뜨기인 방의석으로부터 거센 도전을 받기에 이른 것이다.

'함경도 북청의 유수한 실업가 방의석씨는 일즉부터 함흥택시회사를 경영하고 있거나와, 금번에 서울에다가 대규모 택시업을 개시하고자 경성택시회사를 조직하는 한편, …2층 양식의 사옥을 건축 중이더니 얼마 전에 벌써 낙성되야 영업을 개시하는 중인데, 택시 5, 60대를 두어….'

결국 민규식은 함경도 북청의 시골뜨기인 방의석에게 밀려 택시회사를 접어야 했다. 그리고 이후 택시업계에서는 물론 상계에서조차 그의 종적을 한동안 찾아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민규식이 누구이던가. 나라 안에서 가장 돈 많은 민영휘의 막내아들이 아니던가.

그런 민규식이 다시금 상계에 모습을 나타내게 된 것은 1930년대였다. 경성 시내에 때 아닌 빌딩 건설 붐이 요란하던 시기였다. 이 무렵 서울의 대규모 양대 건설회사는 단연 '한청사'와 '영보합명회사'였다.

'종로 네거리를 가노라면 반듯이 길 양편으로 하늘을 찌를 듯이 놉히 솟아 제 키를 하늘에 자랑하듯 하는 두 삘딩을 볼 수 있으니' 한 쪽은 영보합명회사의 종로빌딩이고, 다른 한 쪽은 한청사의 한청빌딩이었다. 이중 한청사는 장안의 대부호 한학수 소유였고, 자본금 250만원(약 3000억원)의 영보합명회사는 다름 아닌 민규식이 사장이었다.

이같이 건설회사 사장으로 돌아온 민규식의 종로빌딩은 원래 4층 높이였다. 그러던 것을 대화재가 일어난 이후 한층을 더 높여 5층까지 올림으로써 종로 거리에서는 최고층 빌딩이 됐다. 길 맞은편에 들어서게 될 경쟁사인 한청사의 현대식 호텔에 조금도 뒤질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두 아들의 기업 경영은 별 신통치 못했던 것 같다. 막내아들 민규식은 개항장을 통해 들여온 택시회사에 이어 막대한 자본을 앞세운 영보합명회사로 재기를 노렸으나, 끝내 뚜렷한 성과를 올리지 못한 가운데 이후 상계에서 잊혀져갔다.
장남인 동일은행장 민대식 또한 다르지 않았다. 1918년 그가 인수 합병하던 해의 조선한일은행과 호서은행의 수익률은 각기 10.7%와 7.9%였다. 인수 합병하기 이전인 1930년까지만 해도 각기 8.0%와 9.6%로 두 은행의 수익률은 비교적 양호한 편에 속했다.

한데 민대식이 인수 합병한 그 이듬해부터 6.0%로 떨어진 이래, 계속 곤두박질쳐 1936년에는 5.1%까지 하락했다. 같은해 경성합동은행 10.9%, 호남은행 14.3%, 조선상업은행 6.4%, 한성은행 6.6%로 전체 평균 7.8%에도 한참 못 미치는 저조한 수익률을 기록하는데 그쳤다.

헌데도 은행장으로서 교제하는 범위가 특수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의 취향 탓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명월관'이나 '식도원' 같은 조선요릿집을 내버려두고 굳이 남촌의 혼마치 거리에 자리한 일본요릿집 '화월'이나 '그 별장' 등을 찾는 경우가 잦았다 한다. 그리고 그런 일본요릿집에서 으레 고주망태가 돼 대개 밤 11시나 자정이 돼서야 자가용으로 귀가한다는 소문만이 당시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을 따름이었다. 물론 이후에도 수익률이 악화되고만 은행 경영 말고 또 무슨 사업에 투자를 했다거나 벌였다는 소문은 들리지 않았다. 사치와 향락, 돈 쓰는 일 말고는 눈에 띄는 활약상을 찾을 수 없었다.

더구나 이 시기는 세계가 대공황에 접어드는 시점이었다. 전통적으로 토지를 많이 소유한 지주경영 또한 수익이 현저히 줄어들어 토지를 붙잡는 대신에 무언가 제2차 산업을 찾아야만 했다.

이런 중대한 시기에 민영휘가 향년 83세로 세상을 떴다. 세간의 관심은 그가 남긴 막대한 유산에 쏠렸다. 이럭저럭 합산해도 4000만원(약 4조8000억원)에 달한다는 유산 말고도 중국 상하이 모 외국계 은행에 적립시켜 놓은 것만도 수천만원에 달한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은 터였다.

그러나 상하이 은행 돈은 민영휘의 명의로 국가에서 공금을 맡겨놓았던 것으로 밝혀지면서 그가 남긴 유산이 1200만~1300만원(약 1조4000억원) 정도인 것으로 알려졌다. 두 아들의 잇따른 사업 실패로 말미암아 과거에 비하면 재산이 절반 이상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아무렇든 민영휘의 유산은 그의 아들들에게 분배됐다. 장남인 민대식에게는 4만석지기 토지에 현금 수백만원이 돌아갔고, 둘째아들 민천식(이미 사망해 미망인의 몫)에게는 4만석지기의 토지와 현금 수만원이, 그리고 막내아들 민규식에게는 3만석지기 토지와 현금 수만원이 나누어졌다.

그러나 이후 동일은행의 민대식도, 영보합명회사의 민규식도 이내 상계에서 그 종적을 감추고 만다. 다만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4년 10월, 화신백화점의 박흥식이 주동이 돼 경성 상계의 유력한 기업인들과 공동으로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를 설립했을 때 잠깐 민대식의 이름이 이사 명단에 오른 것이 마지막이었다. 이듬해 곧바로 해방이 되면서 일본인들이 남겨두고 떠난 공장이며 산업시설, 기업체 등 숱한 적산기업을 사실상 국내 기업인들에게 거저 나누어주다시피 한 명단에서조차도 그들 형제의 이름은 끝내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리고 그와 같은 전환기의 역사 속에서 기업의 몸집을 불리는데 실패했다는 것은 이미 경쟁력을 상실한 채 일찌감치 뒷전으로 밀리고 말았다는 것을 반증했다. 결국 '부자 3대 가기 어렵다'는 옛말은 당대 최고의 부자였던 천만장자 민영휘와 그의 아들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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