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신문 고경석 기자]홍기선 감독은 한국 영화계에서 보기 드문 과작(寡作)의 감독이다. 1992년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로 데뷔해 단편영화를 제외하면 2003년 '선택'에 이어 최근 개봉한 '이태원 살인사건'까지 고작 세 편을 내놓았을 뿐이다.


비전향 장기수 김선명씨의 일대기를 다룬 '선택' 이후 홍기선 감독은 4년의 준비 기간을 거쳐 '이태원 살인사건'을 내놓았다. 아시아경제신문과 만난 홍 감독은 "출발 자체도 상업적인 의도가 크지 않았고 대규모 개봉도 생각하지 않았다"며 "투자자에게 손해만 가지 않게 손익분기점인 50만명만 넘었으면 좋겠다"고 소박한 바람을 전했다.

'이태원 살인사건'은 12년 전 서울 이태원의 한 햄버거 가게 화장실에서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사건을 소재로 한다. 두 명의 한국계 미국인 청년이 '재미로' 사람을 죽인 이 사건은 결국 증거 불충분으로 범인을 밝혀내지 못한 채 종결됐다. 한국 사법 시스템의 허점을 드러낸 부끄러운 기억인 셈이다.


피해자 가족에게 씻을 수 없는 큰 상처를 준 이 사건을 굳이 영화로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홍 감독은 "미군과 한국 간의 관계를 소재로 다뤄보고 싶었는데 다른 사건들은 저예산으로 만들기 쉽지 않을 것 같았다"며 "한미관계를 정치적으로 다루는 건 아니지만 문화적 정체성을 녹여낼 수 있을 것 같아서 이 사건을 선택했다"고 설명했다.

홍 감독은 "잊고 있었던 것을 환기시키는 것"이 연출 의도라고 말했다. 살인자에 의해, 국가에 의해 두 번 죽임을 당했던 고인에 대해 최소한 국가라도 책임을 지는 게 옳지 않느냐는 것이 홍 감독의 주장이다.


이 사건을 영화로 만들겠다고 했을 때 고인의 가족은 어머니를 빼고 모두 반대했다고 한다. 세월이 지나가면 잊히는데 왜 또 아픔을 건드리냐는 것이었다. 결국 가족의 허락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시나리오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일단 미해결 사건이고 결론이 없으니 구성이 쉽지 않았죠. 상업영화로 만들려고 모 제작사와 1년 넘게 작업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본질에 어긋난 거 같아서 다시 바꿨죠. 만족스럽게 완결된 상태에서 촬영을 시작한 건 아닙니다. 다만 더 이상 끌면 안 되겠다 싶어서 촬영에 들어갔죠."


홍 감독의 아내이자 감독 데뷔를 준비 중인 이맹유 작가는 피해자의 유가족과 당시 사건을 담당한 검사, 변호사 등 40여명을 취재해 최대한 사실에 가까운 픽션을 만들어냈다. 불평등한 한미관계를 그릴 수도 있었겠지만, 감독은 사건현장 보존조차 돼 있지 않고 수사기록조차 제대로 남아있지 않은 사법 시스템의 허점을 지적한다.


민감한 소재인 탓에 제작 과정이 쉽지는 않았지만 주연배우 장근석과 정진영이 가세하면서 생각 외로 촬영은 순조롭게 끝났다. 극적 구성을 위해 스무 신 정도를 삭제해야 했던 점이나 애초에 의도했던 만큼의 깊이가 엔딩 장면에서 표현되지 않은 것 같아 아쉽기는 하지만 결과물에 대해 홍 감독은 어느 정도 만족해했다.


홍기선 감독은 "미국에 대한 한국사회의 콤플렉스와 우리 사회가 지닌 정체성의 혼란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교훈적인 주제는 없다. "이런 황당한 사건이 있었는데 왜 이런 결론이 났는지 한 번만이라도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그는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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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개봉한 '이태원 살인사건'은 개봉 1주일여 만에 35만명을 모았다. 손익분기점을 넘는 것은 어렵지 않아 보인다. 홍기선 감독은 '이태원 살인사건'을 뒤로하고 다음 작품을 구상 중이다. 차기작의 주제는 '인권(人權)'이다.




고경석 기자 kave@asiae.co.kr
사진 이기범 기자 metro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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