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시대 재테크]서서히, 그리고 갑자기: 헤밍웨이와 시장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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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종종 시장보다 더 정확하게 인간의 심리를 설명한다. 금융시장을 이해할 때 헤밍웨이의 소설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를 떠올린다. "처음에는 서서히, 그리고 어느 순간 갑자기." 파산을 설명하는 문장이지만, 이것이야말로 시장을 설명하는 가장 정확한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시장은 늘 그렇게 움직인다. 코스피의 장기 흐름을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변수는 반도체 수출이다. 반도체 사이클의 초기 국면을 떠올려보면 이해가 쉽다. 메모리 가격이 바닥을 찍고 서서히 상승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는 누구도 확신하지 않는다. 기업들은 생산을 늘리지 않고, 투자자들은 여전히 과거의 하락을 기억한다. 겉으로 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가장 중요한 변화가 이때 시작된다. 재고가 줄어들고, 가격이 반등하고, 주문이 조금씩 늘어난다. 이것이 '서서히'다.

그리고 변화는 축적된다. 반도체 수출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기업 실적이 급격히 개선된다. 이익이 숫자로 확인되고, 회의적이던 시장은 뒤늦게 방향을 바꾼다. 이때 주가는 빠르게 상승한다. 투자자들은 묻는다. "왜 갑자기 이렇게 올랐는가?"


하지만 실제로는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진행되던 변화가 드러난 것뿐이다. 시장의 가장 큰 함정은 바로 이 '갑자기'다. 사람들은 변화를 눈에 보이는 순간에만 인식한다. 그래서 항상 늦다. 확신을 갖는 시점은 이미 많은 것이 반영된 이후다. 투자자는 가장 비싼 가격에서 매수하게 된다.

그리고 사이클이 꺾일 때, 같은 일이 반복된다. 수출 증가율이 둔화하기 시작할 초기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일시적 조정'이라는 해석이 지배한다. 그러나 둔화가 지속하면 재고가 쌓이고, 가격이 하락하며, 수출이 감소한다. 그 순간 주가는 급락한다. 또다시 질문이 나온다. "왜 갑자기 이렇게 떨어지는가?"


하지만 답은 동일하다. 이미 오래전부터 진행되던 변화가 드러난 것뿐이다. 중요한 것은 '수준'이 아니라 '방향'이다. 시장은 절대 수준이 아니라 변화의 속도를 반영한다. 헤밍웨이의 문장은 이 점을 정확하게 짚는다. 삶이든 시장이든, 모든 변화는 축적의 결과다. 그리고 인간은 그 축적을 보지 못한 채 결과만 본다.


'서서히'를 견디는 인내가 필요하다. 확신이 없는 구간에서 방향을 읽고 기다리는 힘이 필요하다. 동시에 '갑자기'에 휩쓸리지 않는 절제도 필요하다. 모든 사람이 확신을 가질 때는 이미 늦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시장은 늘 우리를 시험한다. 불확실할 때는 두려움을, 확실할 때는 탐욕을 자극한다.


반도체 사이클은 변하지 않는다. 기술은 바뀌고, 수요는 달라지지만, 인간의 행동은 반복된다. 인공지능(AI)이 등장해도, 메모리 구조가 바뀌어도, 시장의 움직임은 결국 같은 패턴을 따른다. 과잉 기대가 형성되고, 투자와 레버리지가 확대되며, 그 후 조정이 온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은 '서서히, 그리고 갑자기' 진행된다.


우리는 종종 시장을 복잡하게 이해하려 한다. 그러나 본질은 의외로 단순하다. 보이지 않는 변화를 읽고, 눈에 보이기 전에 행동하는 것. 헤밍웨이는 인간의 삶을 그렇게 그렸고, 시장도 그와 다르지 않다. 투자란 미래를 맞히는 일이 아니라, 이미 시작된 변화를 알아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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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익 한양대 미래인재교육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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