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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火요일에 읽는 전쟁사]히틀러의 파리 폭파 명령을 거부한 '콜티츠' 장군을 아시나요?

최종수정 2019.04.16 16:33 기사입력 2019.04.16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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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히틀러의 파리 파괴명령 거부한 콜티츠 장군
세계문화유산 즐비한 파리, 잿더미로 변할 뻔...파리의 수호자라 불려
콜티츠 장군 장례식에 프랑스 정부인사들, 레지스탕스 요인들이 참여하기도


1944년 8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성공한 연합군이 밀려오면서 히틀러는 노트르담 성당을 비롯해 파리시 곳곳에 폭탄을 설치하고 파리 주둔 독일군에게 파리를 폐허로 만든 뒤 퇴각할 것을 지시했지만, 당시 주둔군 사령관인 콜티츠 장군은 이 명령을 거부했다.(사진=영화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장면 캡쳐)

1944년 8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성공한 연합군이 밀려오면서 히틀러는 노트르담 성당을 비롯해 파리시 곳곳에 폭탄을 설치하고 파리 주둔 독일군에게 파리를 폐허로 만든 뒤 퇴각할 것을 지시했지만, 당시 주둔군 사령관인 콜티츠 장군은 이 명령을 거부했다.(사진=영화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장면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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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세계문화유산인 프랑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이 화마에 휩싸여 전 세계인들의 애도 물결이 이어지는 가운데 다시금 주목받는 한 장군이 있다. 과거 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의 파리 폭파 명령을 끝까지 거부하고 파리시 일대의 세계문화유산들을 보존한 인물로 알려진 '디트리히 폰 콜티츠(Dietrich von Choltitz)' 장군이 그 주인공이다.


1944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성공한 연합군은 파리로 밀려오고 있었고, 패색이 짙어진 나치 독일군은 퇴각하면서 파리시를 완전히 파괴코자했다. 당시 파리 방어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콜티츠 장군은 히틀러의 명령하에 노트르담 대성당, 에팔탑, 루브르 박물관, 콩코드 광장 등 모든 유명한 문화유산들에 폭탄을 설치하고 히틀러의 폭파명령을 기다려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히틀러의 폭파명령을 끝까지 거부하고 끝내 연합군에 항복해 파리의 구원자라는 명성을 얻게 됐다.

히틀러는 무려 9차례나 전화로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라고 물었다고 전해진다. 이 기막힌 명령의 이야기와 그의 일대기는 르네 클레망 감독의 1966년 작품인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Paris Brule-t-il?)'란 영화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훗날 그는 "히틀러를 배신할지언정 인류는 배신할 수 없었다" 회고했다 전해진다. 1944년 8월1일부터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연합군에 항복한 그달 25일까지 한달간 겪은 인간적인 고뇌는 전 세계 교과서에도 두루 실리기도 했다.


1944년 8월, 나치독일의 파리 방어군 사령관이자 히틀러의 파리 폭파명령을 거부해 파리의 구원자로 이름을 남긴 디트리히 폰 콜티츠(Dietrich von Choltitz) 장군의 모습.(사진=위키피디아)

1944년 8월, 나치독일의 파리 방어군 사령관이자 히틀러의 파리 폭파명령을 거부해 파리의 구원자로 이름을 남긴 디트리히 폰 콜티츠(Dietrich von Choltitz) 장군의 모습.(사진=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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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파리의 구원자는 원래 독일 동남부 슐레지엔 지방 귀족가문 출신이었고, 아버지 역시 프로이센 왕국의 군인이었다. 14살이 된 1907년 드레스덴의 사관학교에 입교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보병장교로 빠른 진급이 이뤄졌다. 그는 마른전투, 이프로전투, 솜 전투 등 1차대전 서부전선의 굵직한 전투를 대부분 겪었다. 훗날 그에게 파리 폭파 명령을 내릴 히틀러는 상병이었다.


여러 전장에서 능력을 인정받았던 그는 나치정권이 수립된 이후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 합병, 2차대전 당시 네덜란드 전선 등에서 곧바로 활약했고 이후 에리히 만슈타인 휘하에서 러시아와의 동부전선에 투입됐다. 이후 전선 상황에 따라 이탈리아, 다시 러시아 전선 등으로 옮겨가다가 1944년 8월1일, 대장으로 진급됨과 동시에 프랑스 군정장관 겸 파리 방어군 사령관으로 임명됐다. 직함은 그럴듯 했지만 이미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패색이 짙어진 프랑스에서 연합군의 발목을 잡야할 작전에 투입된 셈이었다.

휘하 주둔군은 이미 1만7000여명 남짓이었고 프랑스 전역에서 밀려들고 있는 레지스탕스군과 서북쪽에서 밀려오는 연합군을 동시에 맞아야했다. 히틀러는 그에게 "파리는 잿더미 외에 적의 수중에 넘어가선 안된다"며 파괴 및 소개를 하고 철군할 것을 명령햇고 파리 곳곳에 폭탄더미들이 설치됐다. 그가 정확히 어떤 생각을 갖고 부임을 했었는지는 명확치 않지만, 그는 대부분의 다른 유럽인들과 마찬가지로 파리를 매우 사랑했던 사람으로 알려져있다.


콜티츠 장군이 히틀러의 9차례에 걸친 파리 폭파 명령을 거부, 연합군과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항복하면서 세계문화유산이 즐비한 오늘날의 파리는 보존될 수 있었다.(사진=영화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장면 캡쳐)

콜티츠 장군이 히틀러의 9차례에 걸친 파리 폭파 명령을 거부, 연합군과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항복하면서 세계문화유산이 즐비한 오늘날의 파리는 보존될 수 있었다.(사진=영화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장면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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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는 중세시대 이후부터 이미 단순히 프랑스의 수도일 뿐만 아니라 유럽인들 모두의 수도였고, 마음의 고향이었다. 1991년 유네스코가 아예 파리 센강 전체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할만큼 구시가지는 발 딛는 모든 곳이 문화재였다. 1차 세계대전을 지나면서 점차 세계의 경제, 외교의 헤게모니는 런던을 거쳐 워싱턴으로 이동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서구문명의 중심지는 파리로 여겨졌다. 당시까지 대부분의 귀족 및 고위층들이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사용했던 것도 파리의 위상을 보여준다.


콜티츠 장군은 파리를 사랑했을 뿐만 아니라 나치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히틀러에 대한 신뢰도 역시 낮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각에서는 그가 파리로 부임되기 전부터 히틀러를 정신병자라 평했다는 설도 남아있다. 이런 여러 판단들이 합쳐져 그는 히틀러의 9번에 걸친 명령을 모두 거부하고 온전한 파리를 연합군에 넘겨줬으며, 이 한번의 판단으로 앞선 전범으로서의 죄도 대부분 탕감됐다. 그는 전범재판 이후 복역 2년만인 1947년 석방됐다. 1956년에는 파리를 방문해 자신이 파리에 주둔했던 당시 지휘본부가 있었던 호텔 르 뫼리스(Le Meurice)를 잠시 방문했다는 일화도 남아있다.


물론 그 역시 나치독일에 협력했고, 러시아 전선에서는 유태인 학살에도 개입했기 때문에 이로 인한 비난도 많이 받았지만, 파리를 지켜냈다는 공로가 모든 죄를 덮어줬다. 1966년 그가 사망할 때 전범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서는 공직자들과 과거 레지스탕스 지도자들까지 장례식에 참석했다. 파리를 불태우라는 부당한 명령에 끝까지 항거하며 인류문화유산을 지켜낸 그의 공로를 기리기 위함이었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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