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할 곳 없는 성폭력 피해자, 두번 운다
상담건수 10년간 4배 늘었는데
지역상담소는 되레 20% 줄어
대부분 봉사사업, 지원금 부족
운영난에 폐업할 수밖에 없어
[아시아경제 이현주 기자, 이관주 기자]"좋지 않은 일을 당했는데 상담도 받기 어렵다니 피해자만 두 번 울리는 일 아닙니까."
경기도 시흥에 거주하는 30대 직장인 A(여)씨는 최근 회사 회식 도중 불쾌한 일을 겪었다. 직장 상사가 술에 취해 신체를 더듬는 등 성추행을 한 것이다. 고심 끝에 A씨는 전문적인 상담을 받기 위해 지역에 있는 성폭력 상담소를 찾았으나 허사로 돌아갔다. 시흥에 있던 상담소 2곳 모두 오래전 문을 닫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결국 A씨는 집에서 50분 거리에 있는 인천 소재의 한 상담소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이마저도 일주일 넘게 기다린 뒤였다. A씨는 "전화나 인터넷 상담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피해를 당한 입장에서는 직접 상담사를 만나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고 싶은 게 당연한 것 아니냐"면서 "가뜩이나 성 관련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는데 도시에서조차 상담소를 찾기 어렵다니 이해할 수 없다"고 분개했다.
'어금니 아빠' 이영학씨 사건 등 대형 성범죄를 비롯해 직장 내 성추행 등 성 관련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으나 최근 10년 사이 피해자들을 최일선에서 지원하는 성폭력 상담소 5곳 중 1곳은 문을 닫으며 성폭력 피해자들이 고스란히 피해를 떠안고 있다.
17일 여성가족부와 지방자치단체 등에 따르면 2007년 202개소였던 전국 성폭력상담소는 올해 상반기 기준 162개소로 19.8% 감소했다. 반면 같은 기간 성폭력 상담 건수는 2만5443건에서 10만1028건으로 4배가량 증가했다. 성폭력 문제가 심화함에도 이를 전문적으로 상담 및 지원할 기관은 오히려 줄어든 셈이다.
가장 큰 이유는 상담소의 '운영난'이다. 정부와 지자체에서 상담소 한 곳당 매년 수천만 원의 보조금을 지원하고는 있으나 예산 부족으로 한계가 있는 실정이다. 여성가족부의 상담소 예산은 올해 41억7600만원으로 전년 대비 고작 2.6%(1억1000만원) 증가에 그쳤다. 올해 지원 대상 상담소는 전체 162곳 중 104곳(64%)에 불과했다. 상담소는 비영리 법인 또는 민간단체 위탁 운영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인천에서 6년간 상담소를 운영하다 지난해 문을 닫은 한 상담소장은 "상담소 운영이 대부분 봉사 사업이라 지원금을 받지 못하면 소장이 개인 부담으로 직원들의 월급을 줘야 한다"면서 "사명감만으로 운영하기는 어렵다"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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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소 감소로 인한 부담은 온전히 성폭력 피해자들의 몫이다. 피해자가 제때 상담과 지원을 받아 정신적 고통을 치유하고 가해자에 대한 빠른 처벌이 이뤄져야 하지만, 상담이 몰리다 보니 상담소마다 과부화가 걸려 처리가 지연되는 탓이다. 권현정 탁틴내일 아동청소년 성폭력상담소장은 "예방교육으로 성폭력 인식 수준이 높아져 신고율은 높아졌지만 상담소에 일이 몰리다 보니 물리적 한계로 처리가 늦어질 때가 있다"고 설명했다.
관련 단체들은 정부의 지원 강화를 촉구하고 나섰다. 김미순 성폭력상담소협의회 상임대표는 "사안이 생길 때마다 새로운 성폭력상담소 관련 지원정책이 생기지만 정작 기존에 있던 상담소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 마련이 없었다"며 "제도권 안에서 운영하고 있으면서도 사실상 국가가 그 책임을 민간 상담소에 맡기고 있는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20~30년 일하고도 최저임금도 못 받고 일하는 상담사들조차 상당수"라며 "예산을 늘려 운영비 확보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관주 기자 leekj5@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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