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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칼럼]말에 깃든 폭력, 말에 깃든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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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귀 한국외대 교수

정은귀 한국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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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진로상담 차 학생들과 개별 면담을 많이 한다. 청춘의 어지럼증을 함께 나누는 시간이다. 지난 학기 면담 중에는 화들짝 놀란 적이 있다. 바로 '빻았다'라는 말 때문이다. 밀가루를 제분할 때나 곡식을 빻는다는 의미로 치면 이상할 것도 없는 말인데, 요즘 학생들은 '못생겼다'는 뜻으로 "쟤 얼굴 빻았다"라고 한단다. 그 말을 듣고 망치로 얻어맞은 듯 얼얼했다. "귀한 얼굴에 어찌 그런 말을" 하면 아이들 답은 한결같다. "선생님 그건 약과예요. 더한 말이 얼마나 많은데요." 보통의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나누는 말들이 이렇다. 우리 사회에 드리운 외모 지상주의, 심각한 말의 폭력, 오염된 문화를 실감하게 하는 작은 예다.

말에는 느낌이 있다. 좋은 어감의 말은 확산시키고 나쁜 어감의 말은 안 쓰는 노력이 필요하다. 연예인을 열렬히 따라다니던 군단에 쓰인 '~빠'라는 말을 보자. '응답하라' 세대가 '서태지빠' 혹은 '빠순이'라고 말할 때는 귀여운 느낌이 있었다. 그게 특정 정치인에 대한 지지를 비웃는 말로 바뀌면서 어감이 나빠졌다. '모든 게 노무현 탓이다'라고 말하던 시절의 '노빠'에서부터 지금의 '문빠'에 이르기까지 '~빠'는 조롱의 의미다. 지난 10년간 환멸과 혐오만 무성해진 정치의 폐허에서 자라난 비아냥이 집약된 말. 건설적인 담론을 형성하기 힘든 이 말은 그만 썼으면 한다. '문제인' '문죄인' '놈현' 식의 말도 마찬가지. 누구도 '이경박'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권위주의를 허물고 민주화를 앞당기는 노력을 한 대통령에게 마땅한 예의를 갖추는 대신 만만한 말의 폭력을 가하는 일. 우리 수준을 더 낮출 뿐이다.
나쁜 어감으로 의미를 강화하는 예는 셀 수 없이 많다. '된장녀' '개쓰레기' '개저씨' '기레기' '떼법' 같은 말은 설명이 필요 없다. 이런 말들이 현실을 더 실감나게 비춘다면 그건 우리 사회가 그동안 바른 원칙과 정도에서 너무도 벗어나 비틀려졌다는 아픈 증거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말은 집단 무의식을 형성한다. 그 좋은 '된장'을 왜 이렇게 쓰는가. '떼법'은 법위의 법을 비판하기보다 암암리에 당연시하게 만든다. 언론이 제 역할을 못하고 원칙보다 떼가 통하는 곳이 이 나라였으니까. 처음 일베나 특정 그룹에서 쓰던 말이 점점 확산되면서 우리는 서로를 그렇게 할퀴면서 병든 현실을 비웃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이성복)은 척 말이다.

이런 현상을 두고 민주적인 사회로 나아가는 변화로 좋게 해석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 통용되는 혐오와 조롱의 말들은 대개 약자를 겨냥한다. 이건 비겁하다. '~충'이라는 말을 보더라도 '맘충' '급식충' '진지충' '유족충'이라는 말은 힘들게 육아를 하는 여성, 소외된 아이들, 진지한 이들, 가족을 잃은 세월호 유족들에게 너무 큰 상처다. 비꼼과 풍자가 제 몫을 하려면 당당하게 권력층과 강자를 향해야 한다. 한때 관제데모를 일삼던 '어버이연합'이 아무리 어이없더라도 '틀딱충'이란 말은 노년층 전체에 상처를 준다. 혐오의 말로 조롱하기보다 그러한 관제데모를 기획한 권력과 기관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촉구해야 한다.

말은 칼이 아니지만 마음을 베는 날을 가졌다. 우리 사회 도처에 깃든 현란하고 혐오스런 말의 색채를 빼고 말 본래의 뜻을 찾아 정직하게 쓰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혐오와 폭력 문화는 그 자체로 현실이지만 말에서 기생하여 말로 퍼진다. 치유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마음을 잇는 말, 약자를 보듬는 말, 평화를 만드는 말을 짓고 전하는 일에 정성을 쏟을 때다. 말로 살아가는 이의 자기반성을 겸한 다짐이다.
정은귀 한국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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