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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성폭력' 여중생, 그후 12년의 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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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긴그림자 - 드라마 '시그널'로 분노 재폭발…멀쩡히 사는 가해자, 무력한 법…그녀는 지금?

사진 = tvN 드라마 '시그널' 화면 캡쳐

사진 = tvN 드라마 '시그널' 화면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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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무전했을 때 형사님이 그러셨어요.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미제사건은 누군가 포기하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형사님이 포기하지 말아 주세요.”

드라마 ‘시그널’의 이제훈(박해영)은 과거의 형사 조진웅(이재한)에게 당부한다. 현재에 발 딛고 선 그가 과거를 향해 외치는 부탁이자 고함은 어쩌면 드라마에 드리운 현실의 그림자일지 모른다. ‘시그널’이 그려낸 인주 여고생 사건은 2004년 밀양 여중생 사건을 극의 형식을 빌려 풀어내지만, 브라운관에서도 피해자에게 있어 사건의 결과는 크게 바뀌지 않는다. 지난 2011년 개봉한 영화 ‘도가니’ 때도 인화학교 성폭행 사건에 대한 사회적 공분을 바탕으로 밀양 여중생 사건은 재조명됐지만 몇몇 가해자의 신상이 일부 네티즌에 의해 공개되어 테러당하고, 가해자를 옹호한 글을 남긴 여학생이 경찰채용이 됐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해당 여경이 근무하는 경찰서에 항의 전화와 인터넷 게시판의 항의 글이 빗발치는 데 그쳤다.
사진 = 영화 '한공주' 스틸 컷

사진 = 영화 '한공주'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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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과녁

지난 2013년 개봉한 영화 ‘한공주’ 역시 밀양 여중생 사건을 모티브로 사건 이후 피해자의 삶을 다룬 이야기로 관객들의 분노와 공감을 산 바 있다. 예술작품의 모티브로 끊임없이 소환되고 있는 밀양 여중생 사건은 대중에게 공개될 때마다 화제가 되고, 가해자를 향한 여론의 질타도 이어지지만 그뿐이다. 성폭력에 대한 예방 교육은 의무가 아니며, 사건 발생 직후 체계적인 대응과 수사 시 조사지침은 가이드라인에 불과하다. 대신 여론의 분노는 다른 곳으로 향한다. 당시 가해자로 거론된 학생들의 SNS와 이들을 감싼 친구들의 근무지엔 연일 욕설, 해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따라붙는다. 과거 가해자를 두둔했던 여경의 근무 경찰서 홈페이지엔 해직 탄원 글이 쇄도하고, 당시 기소 후 공소권 없음으로 불기소처분을 받은 한 남성은 지난 3일 인터넷 커뮤니티에 해명글을 게재하자마자 네티즌의 거센 비난에 휩싸였다.

끝났으나 끝나지 않은
2005년 당시 밀양 여중생 사건을 담당했던 울산지검은 범행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피의자 10명은 기소하고 20명은 소년부로 송치 처리했으며 나머지 13명에 대해서는 “피해자와 합의 또는 고소장에 포함되지 않음”을 이유로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렸다. 소년부로 송치된 20명 중 4명은 소년원 1년, 16명은 봉사활동 및 교화처분을 받았고, 기소된 10명 또한 소년부 송치 결정을 받으며 사건은 마무리됐다. 당시 가해 학생들이 소년원에서 보호관찰을 받고 나와 현재 큰 문제 없이 지내는 것으로 알려지며 가벼운 형량, 솜방망이 처벌이 다시 한 번 공론화 됐다.

수사과정에도 허점은 많았다. 당시 A양을 조사하던 김모 경장은 “(너희들이) 밀양 물 다 흐려놨다”며 폭언을 했는가 하면, 피해자의 구체적인 인적사항과 피해사실이 고스란히 자료를 통해 언론에 제공되었다. 초기 수사과정에서 여성경찰관 배치 또한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별도의 범인 식별실이 있었음에도 피의자 41명과 A양을 직접 대질조사해 피해자의 정신적 충격을 가중시켰으며, 수사 후 피해자 보호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가해자 가족들과 접촉하도록 방치해 이들이 협박에 시달리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이어졌다. 폭언에 대한 피해보상은 재판을 통해 이뤄졌으나, 당시 담당 서장의 징계성 보직 이동 처리를 제외하고는 단순한 문책과 내부 징계가 권고된 것이 국가인권위원회가 주도한 밀양 여중생 사건 인권침해 직권조사에 따른 후속조치의 결과였다.

사진 = tvN 드라마 '시그널' 화면 캡쳐

사진 = tvN 드라마 '시그널' 화면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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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어디에?

대중이 이토록 분노하고, 여론이 가해자와 그 주변인들에게 비난을 쏟아붓고 있을 때 당시 피해 여학생인 A양은 어떻게 지냈을까. 사건 당시 A양 무료변론에 나섰던 강지원 변호사는 2011년 한 언론매체와의 통화에서 A양은 사건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일부 피해자들로부터 받은 합의금은 알코올 중독이던 아버지가 모두 가져갔고, 이혼한 어머니와 서울로 거처를 옮겨 학교에 간신히 입학했지만 얼마 뒤 피의자의 어머니 한 명이 학교로 쫓아와 탄원서를 써달라 소동을 벌여 학교를 그만뒀다는 사실을 전한 바 있다. 몇 차례의 자살시도와 가출 또한 이어졌다고도 했다. 평범한 삶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A양의 근황과 SNS를 통해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것으로 알려진 가해자들의 삶이 너무도 대조됐기에, 재판은 끝났지만, 처벌은 미흡했던 과거의 잘잘못은 끊임없이 대중에게 호명되어 분노를 반추하는 재료로 소모되고 있다. 그 사이, 아무도 모르는 A양의 삶은 어떻게 이어지고 있을까.

사진 = MBC '뉴스데스크' 화면 캡쳐

사진 = MBC '뉴스데스크' 화면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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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각한 후유증

밀양 여중생과 같은 성폭력 피해 여성의 경우 사건 이후 뇌 기능에 이상증세가 나타난다는 연구결과가 있었다. 지난 2012년 아주대학교병원 핵의학과 안영실 교수팀은 성폭행 피해 여성 12명을 대상으로 뇌를 검사한 뒤 폭행을 당하지 않은 여성 15명의 뇌 영상을 비교분석했는데, 그 결과 뇌 좌측 해마, 상측 측두엽, 중심전회 부위의 기능과 혈류가 줄어드는 현상이 관측됐다고 밝혔다. 두려움과 공포심 등을 관장하는 부위의 뇌 혈류량 감소를 통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환자들이 나쁜 기억을 억누르거나 잊으려 하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지난 2015년 12월 15일엔 성폭력 범죄 피해를 당한 경우 외상 후 스트레스성 뇌 질환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는 연구도 대검찰청과 이화여대 뇌융합과학연구원을 통해 발표되기도 했다. 이날 발표에 따르면 범죄 발생 후 3개월이 피해자의 외상 후 스트레스로 인한 뇌 질환 등의 장애 치료에 적절한 ‘골든타임’ 시기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밀양 여중생의 경우 그 기간 동안 가해자 학생들과 그 가족들로부터 협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사건 이후 이어진 그녀의 비극적 삶만큼이나 피폐했을 심리상태를 연구결과를 통해 미력이나마 유추해볼 수 있다.


마녀사냥보다 더 중요한 것

밀양 여중생 사건의 가해자로 지목된 한 남성의 SNS에는 세월호 학생들을 추모하는 노란 리본이 게재되어 있었다. 폴란드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통상의 견해와는 달리 극악한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이 극악한 자들만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대중 속에서 평범한 일상을 보내면서 보통의 부조리에 우리와 함께 분노하고 또 슬퍼하고 있었다. 사건 당시 공범자와 연루자 중 처벌을 피해간 사람만 70여 명으로 알려졌다. 그게 만약 나였다면, 일진 친구의 협박에 못 이겨 사건 현장의 보초를 섰을 수도, 카메라를 들고 있었을 수도 있었다. 엄정한 법적 처벌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 그리고 피해자인 A양이 절망에 내몰렸을 때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는 대중의 좌절과 무력감이 그녀를 대신해 키보드 위의 복수를 펼치고 있다.

복수는 행위를 통해 내가 얻는 이익이 없고, 심지어 손해를 보더라도 복수 자체에서 기쁨을 느끼기 때문에 그자체로 만족감을 준다는 스위스 취리히 대학 연구팀의 연구결과가 있다. 복수를 결심하는 것만으로도 뇌의 선조체가 강하게 반응하게 되는데, 선조체는 인간의 감정을 지배하는 뇌의 한 부분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는 행동하지 못한 죄책감을 간접적 형태의 마녀사냥 위에 ‘복수’ 프레임을 덧씌워 마음대로 해소하고 있을 뿐이다. A양의 정상적 삶을 도와줄 사회 안전망이 기초생활수급에 따른 지원금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잊은 걸까, 가해자, 가해자의 주변인들에게 폭언과 욕설을 일삼고 그들의 삶을 망가트리는 것이 새로운 정의구현의 방법이 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A양의 희생을 담보삼아 복수의 쾌감을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해자를 찾아내 응징하는 사회적 복수심리만큼이나, 이제 성인이 됐을 피해자가 누구보다도 잘 살 수 있는 여건과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성폭력 피해자의 상담경력을 총선 후보자의 스펙으로 활용하는 시대에 피해자의 인권은 여전히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탈무드는 “잘 사는 것, 그것이 최고의 복수다”라고 기록했다. 밀양 사건의 A양을 비롯한 성폭력 피해 여성들이 사건의 아픔을 제대로 씻어내도록 도와줄 때다.




김희윤 작가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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