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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여행가의 밥] 담양 대숲과 찻집 명가은

최종수정 2020.01.22 17:39 기사입력 2015.12.09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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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사에서 일할 때 매달 담양으로 출장길에 올랐다. 남도 음식을 달마다 담아내는 일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어느 해 봄, 황량한 논에 활짝 핀 보랏빛 자운영 물결을 처음 보고는 꽤 오랫동안 황홀함에 도취되어 살았고 봄이 깃든 명옥헌의 봄과 이름 모를 식당에서 맛본 된장 물김치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달콤하다.


사람과 시골 풍경과 음식들이 버무려진 담양을 한동안은 멀리하다가 요 몇 년 다시 찾고 있다. 대나무숲과 메타세쿼이아길에 대한 아쉬움은 소쇄원과 명옥헌이 달래주고 느리게 사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서 느린 삶의 시계를 선물 받는다. 알록달록한 늦가을의 단풍이 피날레를 장식하고 떠난 후 휑한 마음을 달래줄 곳은 여행자의 마음을 여전히 푸르름으로 물들이는 담양이라는 땅이다.


세상이 무채색으로 물들어 갈 때 무언가에 쫓기듯 찾게 되는 곳. 스삭스삭 댓잎 스치는 소리는 성난 마음에 고요를 초대한다.

세상이 무채색으로 물들어 갈 때 무언가에 쫓기듯 찾게 되는 곳. 스삭스삭 댓잎 스치는 소리는 성난 마음에 고요를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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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숲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 소쇄원

일본에서 무수한 정원을 보았다. 군더더기 없이 간결한, 간혹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 인정미에 마음을 따끈하게 데우려고 찾았다가 오히려 차가워져 돌아온 적도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우리나라 정원은 어느 정도 인공미는 존재하지만 마음이 푸근해진다. 소쇄원(瀟灑園)이나 보길도의 세연정이 그렇고, 만휴정도 그렇다.


소쇄원에서 선비들의 기개와 풍류를 엿보게 됐다. 양산보가 스승인 조광조가 기묘사화로 세상을 떠나자 낙향하여 지은 별서 원림이다. 옛날에는 10여 채의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는데 지금은 제월당, 광풍각, 대봉대 등이 남아 있을 뿐이다. 주인이 거처하며 조용히 독서를 하던 곳이었다는 제월당(霽月堂)은 ‘비 갠 뒤 하늘의 상쾌한 달’이란 뜻이고, 별당인 광풍각(光風閣)은 ‘가슴에 품은 뜻을 맑고 맑음이 마치 비 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과도 같고 비 갠 하늘의 상쾌한 달빛과도 같다’라는 송나라 유학자의 인물됨에서 따왔다고 한다. 규모는 소박하지만 기개 넘치는 건물의 주변에는 대나무와 매화, 동백나무, 배롱나무, 산사나무, 산수유 등이 어우러졌다. 3대에 걸쳐 조영된 소쇄원은 당대 지식인들이 드나들던 문화 교류의 장이었다고 전해진다. 송시열은 ‘소쇄원도’라는 판각을 남겼고, 양산보의 사돈인 김인후는 1548년 당시의 소쇄원의 빼어난 계절 풍경을 ‘소쇄원 48영’으로 읊었다고 한다. 고즈넉한 공간에서 눈과 귀를 청량하게 씻고 나면 마음에 상쾌한 바람이 분다. 단체 관광객들과 만나지 않는다면….


시냇물이 흘러갈 수 있도록 담장을 세운 소쇄원. 인공적인 조경을 피하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정자와 집을 배치하였다.

시냇물이 흘러갈 수 있도록 담장을 세운 소쇄원. 인공적인 조경을 피하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정자와 집을 배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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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의 풍류로 그득한 소쇄원.

남도의 풍류로 그득한 소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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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이 거처하며 독서를 하던 공간인 제월당.

주인이 거처하며 독서를 하던 공간인 제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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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전체가 세계유산이나 다름없는 교토에 살면서 정원 이야기만 나오면 콧대가 높아지는 교토 친구들의 한국 여행길에 소쇄원을 안내한 적도 있었다. 풍경보다 교토 친구들을 감동시킨 것은 별서 정원 주인의 유훈이었다. “어느 언덕이나 골짜기를 막론하고 나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으니 이 동산을 남에게 팔거나 양도하지 말고 어리석은 후손에게 물려주지 말 것이며, 후손 어느 한 사람의 소유가 되지 않도록 하라.” 후손들은 양산보의 유훈을 받들어 소쇄원을 지켜냈다.


조선시대 선비 양산보의 15대에 걸친 후손들의 복원과 관리로 민간정원의 원형을 간직해 올 수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선비 양산보의 15대에 걸친 후손들의 복원과 관리로 민간정원의 원형을 간직해 올 수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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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쇄원 옆, 오후의 찻집 명가은

담양은 맛의 고장이다. 떡갈비며 대통밥, 숯불갈비는 담양에 가서 안 먹으면 서운할 음식들이라고들 한다. 그런데 나는 소쇄원 근처의 명가은이란 찻집에서 마시는 차 한잔을 더 즐긴다. 긴 담에 걸려 있던 노래를 듣고 나서 소쇄원의 대나무숲을 빠져나오면 따끈한 차 한 잔이 생각나기 마련이다. 누군가는 ‘강하지 않으면서도 멀리서도 끌리는 담담하고 우아한 차 향은 배낭을 꾸리고 길을 떠나게 만드는 원인’이라고 했다.


농가를 개조한 한옥 찻집은 간판도 없고 찻값을 받는 이도 없다. 눈치 볼 것 없이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물며 차를 마시다가 입구 앞에 놓인 궤짝에 찻값을 지불하면 된다(한 사람에 5,000원). 나무 탁자에 녹차와 녹차를 발효시킨 황차를 놓고 여행 친구와 마주 앉아 차를 마셨다. 마주 보았으나 두 사람 다 시선을 빼앗긴 곳은 유리창 너머의 풍경이다. 그 풍경에 홀려 찻집을 나와 무작정 마을을 걸었다. 햇살이 잘 드는 양지의 마을이었다. 소박하고 단아하며 포근함. 찻집 명가은은 반석마을의 성정을 그대로 닮아간다.


농가를 손 봐 문을 연 찻집 명가은이다.

농가를 손 봐 문을 연 찻집 명가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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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가은의 녹차와 황차.

명가은의 녹차와 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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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아하고 소박한 차 도구들.

단아하고 소박한 차 도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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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켠에는 전시, 판매되는 도자기와 죽공예품, 야생화 자수가 놓인 손수건 등이 놓여 있다.

한 켠에는 전시, 판매되는 도자기와 죽공예품, 야생화 자수가 놓인 손수건 등이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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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값은 손님이 정직하게 계산하는 시스템. 1인당 5천원.

찻값은 손님이 정직하게 계산하는 시스템. 1인당 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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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곤소곤 Tip

소쇄원과 명가은 지척에 볼거리 하나가 더 숨어 있다. 담양과 광주 사이에 자리한 광주호다. 충효교라는 작은 다리 하나를 경계로 담양군과 광주광역시로 나뉘는데 광주호 생태공원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이름은 참 멋이 없지만 걸을 맛이 나도록 산책길을 꾸며놓았다. 음식점이나 찻집을 차리게 해달라는 민원이 끊이지 않았지만 환경보존 정책에 따라 생태원으로 거듭난 기특한 사연이 전해진다. 18만 5123㎡(5만 6000여 평)의 생태원에서 특히 돋보이는 것은 버드나무 군락지와 습지 보전 지역의 생태 탐방로의 빼어난 풍경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다 다른 맛이 나니 찾아봄직하다.


소쇄원을 찾았다면 시간을 더 내어 가까이에 자리한 광주호 생태공원에 들러 천천히 느리게 걸어볼 것.

소쇄원을 찾았다면 시간을 더 내어 가까이에 자리한 광주호 생태공원에 들러 천천히 느리게 걸어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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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fomation

담양군청 http://tour.damyang.go.kr (061-380-3150~4)

소쇄원 전남 담양군 남면 소쇄원길 17, 09:00~19:00, 061-381-0115, 입장료 2,000원

명옥헌 전남 담양군 남면 반석길 48-8, (061-382-3513)


글=조경자, 사진=황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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