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아]우리안의 영어 식민지?
[아시아경제 정대진 작가]"It takes so long. I'm afraid you waited long.(참 오래 걸리네요. 오래 기다리셨죠)"
얼마 전 발리여행을 갔다가 공항을 빠져나와 가이드에게 던진 첫마디였습니다. 발리 입국심사가 거의 한 시간 가까이 걸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발리 현지인 가이드는 영어가 아닌 한국말로 대답했습니다.
"오늘 비행기 만석이라 오래 걸렸습니다"
영어 답변을 예상했던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현지인 가이드는 발음만 서툴다 뿐이지 거의 완벽하게 한국말을 구사했습니다. 가이드는 공항에서 호텔로 가는 동안 발리 현지사정과 주변풍경에 대해 쉴 새 없이 한국말로 설명했습니다.
어느새 외국에 와있다는 느낌도 사라질 지경이었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해외에 순전히 놀기 위해 나갔는데 외국 맛도 별로 나지 않았습니다. 그 정도로 가이드는 편하게 한국말을 했고 한국인의 필요와 요구사항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몸은 편했습니다. 하지만 이전에 가이드 없이 해외여행을 다닐 때처럼 현지 마을 골목을 누빈다거나 영어가 안 되는 현지인들과는 손짓발짓으로 이야기해보는 재미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발리 자체가 외국인 관광객이 다닐 만한 구역은 현지인들과 아예 분리되어 있습니다. 호텔 관광지 해변은 먼 출입로에서부터 경비검색대가 있어 외국인 관광객이 아니면 드나들기 힘들어 보였습니다.
영어나 기타 외국어가 통용되는 관광지는 그렇게 발리 현지인들과는 무관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발리 주민들도 관광객들과는 무관하게 농사를 짓거나, 바다낚시를 하며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걔 중에서 외국어를 익혀 관광업에 뛰어든 사람들이 고소득을 올리며 살아가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외국인에 의존해야만 돈을 많이 번다는 식으로 들릴까봐 가이드에게 소득분포 등을 상세히 물을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며칠 둘러보는 동안 짐작은 충분히 갔습니다.
우리도 아마 비슷한 상황이라고 생각됩니다. 무역입국인 우리나라에서도 영어를 잘하고 해외거래나 경력이 있어야 내수시장만 파고들면서 사는 것보다는 돈을 더 만지며 살 수 있습니다. 단순히 돈을 떠나서 삶의 범위와 질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영어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지대해 보입니다. 예로부터 청나라 말을 하는 역관이 당대 최고 부자반열에 올랐고, 구한말 이래로 일어와 영어를 능통하게 하는 사람들이 득세한 경우에서도 보듯이 우리나라 같은 환경에서는 외국어 실력이 개인의 지위나 권세를 높이는데 유용한 수단이었습니다. 하지만 돈벌이나 출세의 수단으로만 한정된 것이 아닌가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외국어가 사회적으로 중요한 수단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외국어 학습 시스템도 매우 발달하고 외국어 전문번역가와 다양한 언어의 외국어학자들도 양산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영어 위주로 그리고 실용성에만 초점이 맞추어지다보니 그간 우리가 놓친 점도 많은 게 사실입니다. 경쟁 위주로 영어 학습을 하다 보니 각개전투 식으로 저마다 영어실력을 갖추어 알아서 자가 발전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단순히 잘 살기 위해 영어를 배우던 시절을 넘어 이제는 삶의 질을 높이고 '세계 속의 한국'이라는 약속을 지켜나가기 위해 새롭게 영어를 바라봐야 할 때입니다. 내부경쟁과 수직적인 계층분리 그리고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소외시켜나가는 수단으로 영어를 악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길가다 간혹 볼 수 있는 'English Zone'이라는 간판들이 발리의 외국인 전용 관광지 입간판처럼 우리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풍경처럼 비추어지는 게 저만의 과민반응일까요. 대부분의 발리 주민들이 좋은 해변과 풍광에서 소외되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우리 안의 '영어식민지'는 없는지 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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