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 굽는 타자기]‘미쳤던’ 시절의 달콤 쌉쌀한 향수
"말이 되느냐. 드라마도 그렇게 쓰면 욕먹는다."
1972년 서울운동장에서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스포츠 경기가 벌어졌다. 전통의 강호 부산고와 신예 군산상고가 맞붙은 고교야구 황금사자기 결승전. 군산상고의 우승을 점친 이는 없었다.
8회까지 팽팽하던 경기가 부산고의 득점으로 4대1이 되자 예상은 현실이 되는 듯했다. 9회말 군산상고의 마지막 공격. 안타와 볼넷으로 스코어는 4대2 원아웃 만루가 됐다. 타석에는 2번 타자 양기탁.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가 노점상을 하느라 아침을 거르고 다니는 학생이었다. 양기탁이 안타를 쳐 동점을 만들자 관중석은 난리가 났다. 경기는 결국 군산상고의 5대4 대역전극으로 마무리됐다. 이후 군산에서 이뤄진 카퍼레이드에는 시민 12만명 중 7만명이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1970년대 고교야구는 한편 한편이 영화였다. 책의 제목처럼 이 시대를 거쳐 온 이들은 모두 고교야구에 미쳐 있었다. 본인이 응원하는 팀이 지기라도 하는 날엔 억울하고 답답해 밥을 못 먹었다고 한다. 선수들도 그랬다. 고교야구팀 소속 선수들은 수백장의 팬레터 공세에 시달릴 정도로 인기를 실감했다고 한다. 결승전에서 패배를 맛봐야 했던 한 선수는 50여년이 지난 지금도 "심판 오심 때문에 졌다.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너무 아쉽다"고 곱씹는다. 책은 70년대 고교야구에 미쳐있었던 이들의 ‘썰’을 잔뜩 풀어낸다.
물론 달콤하게만 그려내진 않는다. 뒷맛이 씁쓸한 얘기들도 가감 없이 털어놓는다. 단기 실적을 내기 위해 유망한 선수들을 혹사시켰던 관행부터 박정희·전두환 군부정권의 3S 정책으로 야구가 부흥했다는 어두운 역사적 배경까지. 야구단에 만연했던 폭력문화도 마찬가지다. 선동렬도 과거 폭력을 휘둘렀던 선배들을 만나면 "그때 왜 그렇게 많이 때렸느냐"고 한 마디씩 한다고 한다. 고교야구 시절부터 특급 투수였던 선동렬도 그렇게 맞았다니 오죽했겠나.
그런데도 왜 우리는 하필 고교야구에 열광했을까. 한 치 앞을 모르는 인생과 닮아있는 당대의 유일한 스포츠였기 때문이다. 경북고처럼 도저히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절대적 강자가 한 시대를 호령하고, 혜성처럼 신예가 등장해 또 하나의 역사를 쓴다.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 성장하는 선수에 감동하고, 좌절을 경험한 팀과 함께 운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반전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그러니 이 책은 ‘아재들의 야구 골방 토크쇼’가 아니다. 제목과 겉표지에 야구가 있을 뿐 본질은 다른 데에 있다. 책은 강렬하게 기뻐하고 실망했던 과거의 열정을 솔직하게 그리워하는 회고록이다. 팍팍한 인생의 스트레스를 고교야구로 풀고자 했던 이들의 향수를 맡아볼 수 있다. 작가는 비록 5060을 겨냥한 이야기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세대를 떠난 공감의 지점이 발생하는 이유다. 책을 다 읽고 나면 고교야구의 즐거움을 제대로 만끽했던 이들이 부러워질 정도다.
다만 "더 이상 그런 즐거움이 없을 것"이라며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고교야구가 사라진 것이지 열광할 소재는 어느 시대에나 존재한다. "요즘 애들은 그 재미를 모른다"고 안타까워할 필요도 없다. 그런 말을 달고 산다면 과거에만 연연하는 꼰대가 된다.
임요환과 홍진호의 스타크래프트 결승전 경기에 환호하며 자란 세대도 있다. 지금은 유튜브로 롤드컵을 보며 페이커의 대활약에 감탄하고 있다. 문화를 누리는 방식이 달라졌을 뿐 돌이켜보면 우리는 늘 무언가에 미쳐있었던 거다. 이 책처럼 언젠가 시간이 흐른 후 2022년 만의 향수를 즐겁게 맡아볼 날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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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우리는 미쳤다 1970년대 고교야구 | 최홍섭 지음 | W미디어 | 438쪽 | 1만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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