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확 늘어난 오케스트라 여성 지휘자…양성 평등·다양성 등 사회적 변화 산물
아직 대다수 유럽악단 女 비율 절반 못미쳐…보수적인 클래식계 女 참여 더 늘려야
장르·사조 전문성 가진 인재 우선시 기조…향후 여성 지휘자 객원 기회 늘어날 전망
무대 위 지휘대를 뜻하는 '포디움(Podium)'은 전통적으로 남성의 아성이었다. 18~19세기 유럽에서 오케스트라가 변모하는 과정은 같은 시기 군대와 관료제를 작동하며 세계 질서의 중심으로 우뚝 선 유럽의 지배 기제와 동일하다. 국제정치학자 조홍식의 지적처럼 "마에스트로의 일사불란한 지휘를 따르는 오케스트라의 조직적 힘의 균형이 고전음악의 핵심"이고 유럽에서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기대 역할은 군대 지휘관과 동격이었다.
남녀가 수행할 직무 차이를 규정하고 사회와 전통이 여성에게 무엇을 허용하고 계승했는지 돌아볼 때 오케스트라 지휘는 남성성을 갖춘 지휘관의 몫이었다.
서양음악이 먼저 여성을 음악가로 인정한 분야는 여성의 이미지나 악기와 음역의 특수성에 기댄 영역부터다.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클라라 슈만(1819~1896)은 건반주자 이전에 '신동' 이미지가 인기를 끌었다. 릴리 라스킨(1893~1988), 우어슐라 홀리거(1937~2014)는 음반 제작과 악단 연주로 여성 하피스트의 수월성을 알렸다.
중세 이후 교회 내 여성의 성악 연주가 가능한 여건에서 구전에 머물던 여성 명가수의 계보는 20세기 들어 본격화한 음반 녹음으로 대륙을 건너 명성이 퍼졌다.
20세기에 영화 '더 컨덕터(2018)'의 실제 인물인 안토니아 브리코(1902~1989), 나디아 불랑제(1887~1979), 사라 콜드웰(1924~2006), 아이오나 브라운(1941~2004)의 선구적 업적이 있다. 하지만 21세기 오케스트라의 '여성 지휘자' 급증은 사회적 변화의 산물이다.
과거에 비해 훨씬 많은 오케스트라가 지휘자를 필요로 하고 성별 관계 없이 젊은 지휘자를 염가에 쓰는 악단이 늘었다. 오케스트라 매니저들은 지휘 콩쿠르 입상자를 주시하고 21세기 들어 여성 참가자가 약진했다.
현 그라츠 오페라 음악감독 옥사나 리니프(2004년 말러 콩쿠르 3위), 전 경기 필 예술단장 성시연(2007년 말러 콩쿠르 2위)이 경연에서 인정 받고 실전으로 역량을 입증했다. 홍콩 출신의 엘림 찬도 런던 심포니 지휘 콩쿠르(2014) 우승으로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대다수 유럽 악단의 성별 분포상 여성은 절반에도 못 미친다. 지난해 8월 런던대학 조사에서 여성 단원 비율이 유럽 36%, 영국 44%, 미국 40%로 나타났다. 베를린 필, 빈 필이 점차 여성 단원에게 문호를 열고 있다. 이 과정도 '양성평등'과 '다양성'을 둘러싼 각국 시민사회의 압박에 뒤늦게나마 회신하는 형태다.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은 악단은 확실히 이상하지 않은가"라는 질문에 유럽의 기성 악단은 여성 지휘자 등용으로 즉답을 미룬다.
2020년대 진입을 앞두고 주요 여성 지휘자들의 상징적 자리 이동이 있었다. 미국 출신의 마린 알솝이 지난해 가을 빈 방송교향악단 감독에 부임했다. 다른 대형 악단들도 알솝과 비슷한 명성의 여성에게 눈을 돌리고 있다.
지난해 샌프란시스코 오페라는 2021년부터 5년 임기로 김은선에게 음악감독을 맡겼다. 바그너 음악 전문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은 내년 신작의 지휘자를 여성으로 예고했다. 이변이 없는 한 시모네 영 전 함부르크 슈타츠오퍼 음악감독이 맡을 것이다.
미국 클래식계부터 여성 지휘자의 효용을 새롭게 보고 있다. 제임스 러바인 전 메트 오페라 음악감독, 플라시도 도밍고 전 LA오페라 총감독의 성추문 여파로 음악감독에 오르는 지휘자의 권력남용 행태를 극도로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볼티모어 심포니 음악감독을 겸임 중인 알솝은 "인간사회의 커다란 테두리 안에서 클래식 음악 세계에 작지만 완결된, 지극히 보수적 소우주가 있다"며 특수성을 설명한다. 클래식계 내부의 자성보다는 "미국에서 여성 대통령이 탄생해야 클래식의 소우주 장벽이 허물어진다"는 입장이다.
지휘자 개인의 해석에 절대적 권위를 부여한 20세기는 지났다. 개별 장르와 사조에 정통한 인재를 우선하는 악단이 늘면서 실력파 여성 지휘자의 객원 기회는 더 늘 듯하다. 그러나 캐스팅과 작품에 대해 책임지는 감독직은 카리스마로 오케스트라를 장악하는 준비된 여성 인재에게만 허락될 것이다.
21세기 들어 고음악앙상블 르 콩세르 다스트레의 활약으로 주목 받은 건반주자 겸 지휘자인 엠마뉘엘 아임은 2008년 베를린 필 지휘 데뷔로 국제적 인사가 됐다. 지휘자 역량을 믿고 실력파 아티스트가 모이는 고음악 제작 특성상 아임은 객원 지휘보다 감독으로 있는 악단에서 진가를 보이는 루틴이 장점이자 한계다.
수잔나 말키는 '지휘 강국' 핀란드 출신으로 현재 어느 악단의 감독을 맡겨도 손색 없을 만큼 역량이 뛰어나다. 그는 2016년 헬싱키 필 음악감독에 취임했다. 이후 베를린 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데뷔해 재초청 받고 있다. 진은숙 작품을 LA에서 여러 번 연주한 그는 현대음악 앙상블 앵테르콩탕포랭 음악감독도 역임했다.
프랑스의 콘트랄토 나탈리 스튀츠망은 가수 출신이 지휘자로 변신해 성공한 사례다. 가수 시절 그는 프랑스와 독일 낭만 가곡으로 극찬 받았다. 자기가 감독하는 고음악 앙상블 오르페오55에서 드라마틱한 자신의 저음을 살린 독특한 지휘 해석으로 호평 받기도 했다. 오르페오55가 존폐 기로에 서게 되자 노르웨이 크리스티안산드 심포니가 음악감독을 맡길 만큼 신망이 두텁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마린 알솝 (C) Grant Leighton, 수잔나 말키 (C) Chris Lee, 카리나 카넬라키스 (C)Matias Border, 미르가 그라치니테 틸라 (C)Lawrence K. Ho, 요아나 말비츠 (C) Saatstheater Nuernberg
원본보기 아이콘캐나타 태생의 소프라노 겸 지휘자 바버라 해니건은 현재 유럽 주류 음악계에서 가장 환영 받는 여성 지휘자다. 그는 사이먼 래틀이 함께 하는 베를린 필, 런던 심포니 공연에서 주로 현대음악을 소화하는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로 주목 받았다. 차츰 노래와 지휘를 겸하는 유머러스한 공연으로 영역 확대에 나서 잘츠부르크 음악제, 루체른 페스티벌도 노크하고 있다.
뉴욕 태생인 카리나 카넬라키스는 래틀의 후광으로 유럽 악단 행정감독들 눈에 든 인물이다. 그는 댈러스 심포니에서 얍 판 즈베던, 유럽 체임버 오케스트라에서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의 대체 지휘에 성공하면서 화제가 됐다. 2018년 네덜란드 방송교향악단 감독으로 부임한 그는 시카고 심포니와 베를린 방송교향악단을 이끌기도 한다.
리투아니아 출신 지휘자 미르가 그리치니테 틸라는 현재 버밍엄 심포니의 음악감독이다. 래틀, 사카리 오라모처럼 런던 밖 변방 악단의 수장이지만 강단 있는 사운드와 단결력으로 세계 중심을 지향한다. 할당식 여성 객원 인선에 의존하지 않고 단원들로부터 인정 받아 감독직을 차지한 드문 사례의 인물이다.그는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확진자로 판정돼 뉴스 면을 장식하기도 했다.
독일 음악계는 니더작센주 힐데스하임 태생인 요아나 말비츠 뉘른베르크 오페라 총감독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다. 권위 있는 음악잡지 '오페른벨트'가 2019년 선정한 '올해의 지휘자'에 뽑히면서 같은 상을 받은 키릴 페트렌코(현 베를린 필 음악감독), 테오도르 쿠렌치스(현 남서독일 방송교향악단 음악감독)와 비견되고 있다.
꼭 봐야 할 주요 뉴스
"삼전·하닉 놓쳐도 기회 있다"…목표가 '100만원'...
객원기자·에투알클래식&컨설팅 대표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