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골목길] 영추문 개방에 새로 열린 '서촌'
43년 동안 굳게 닫혀있던 경복궁의 서쪽 대문인 영추문(迎秋門)이 얼마 전 전면 개방됐습니다. 경복궁의 4개 대문 중에 가장 오랫동안 열리지 않고 있던 이 영추문이 열리면서 이제야 사통팔달하게 된 '서촌' 역시 더 많은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게 됐죠. 보통 서울의 한옥마을이라 하면 '북촌'이 유명하지만, 주로 권력자들의 저택이 많았던 북촌과 달리 서민들의 쪽방이 많았던 서촌이야말로 진짜 한양의 마지막 숨결이 남은 골목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서촌(西村)은 글자 그대로 경복궁 서쪽에 있는 마을을 뜻합니다. 지금은 영추문 바로 옆에 인접한 옥인동과 통인동 일대만을 지칭하지만, 원래는 이보다 좀더 넓은 지역을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동서 폭은 경복궁 영추문 밖부터 인왕산으로 막혀있는 곳까지, 남북으로는 경희궁 일대부터 창의문까지를 서촌이라고 불렀죠. 현재 행정구역으로 따지자면 청운동, 궁정동, 신교동, 옥인동, 효자동, 창성동, 통인동, 누상동, 누하동, 통의동, 체부동, 필운동, 사직동, 내자동, 적선동, 내수동 일대가 모두 서촌이었습니다.
경복궁 영추문 밖 서촌마을 골목길의 모습. 현재 서촌마을은 영추문 서쪽의 옥인동과 통인동 일대를 가리키며, 800여채의 한옥과 빌라, 카페와 상점들이 뒤섞인 관광명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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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촌이 북촌보다 한양 서민들의 애환이 더 짙게 깔려있다 평가받는 이유는 사실 영추문 때문입니다. 주로 무관들과 하급관리들이 경복궁에 출근할 때, 영추문으로 지나다녔기 때문에 이 지역엔 북촌처럼 권문세도가들이 살지 않고 주로 하급관리들과 서민들이 살았죠. 조선시대 양반(兩班)제에 의하면, 국왕이 정무를 볼 때, 국왕 동편에 서는 문관들은 동반(東班), 서편에 서는 무관들은 서반(西班)이라 불렸습니다. 이 둘을 합쳐 양반이라 하는데, 동·서로 나눠 설 뿐만 아니라 출입문도 따로 썼죠. 문관들은 동문으로, 무관들은 서문으로 출입했습니다. 영추문으로 무관들과 하급관리들이 지나다녔던 이유도 이 문이 경복궁의 서문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궁궐 뿐만 아니라 중국 자금성에서도 똑같이 문관들은 동쪽 문을, 무관들은 서쪽 문을 이용했습니다.
그래서 서촌에 남아있는 한옥들을 보면, 북촌보다 훨씬 작고 대부분 비슷비슷하게 생겼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조선후기인 18세기로 접어들면서 한양의 인구가 20만명을 넘어서자 집값이 폭등하게 됐는데, 이때 서촌에 대량으로 작은 평수의 집을 지었다고 알려져있죠. 이곳의 한옥 모습이 조선 후기 집권세력이던 노론(老論)의 주요 정계인사들이 살던 북촌의 한옥들보다 격이 떨어져 보이는데는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조선시대 하급관리들의 경우에는 보통 자신의 고향에 본가를 두고, 서촌에 작은 한옥 한칸에 세를 얻어 단신부임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하네요. 역관이나 의관, 중인들부터 상인들과 서민들이 함께 모여 살아 북촌보다 훨씬 활기찬 곳이었고, 인구 이동도 더 활발했던 지역이었죠. 추사 김정희와 겸재 정선 등이 서촌에서 살던 유명인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에는 여러 정치적 사건들에 휘말렸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경복궁을 기습 점령했을 때도 영추문을 뚫고 들어왔고, 이후 1896년 고종황제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할 때 빠져나간 문도 영추문이었다고 알려져 있죠. 일제강점기 때는 영추문이 일제에 의해 헐리고, 그 자리에 전차가 지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유동인구가 많았고 원주민이 많지 않아 일본인들도 별다른 거리낌없이 많이 자리잡고 살게 됐죠.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오고가면서 오늘날 복잡다단한 형태의 주택이 즐비한 서촌마을의 골목길은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남아있는 서촌의 한옥 800여채 중 600여채의 기본 골격은 1910년대 이후 일제의 주택계획에 의해 대량으로 지어진 개량한옥으로 알려져있죠. 이 지역의 명소 중 하나인 시인 '이상'의 집 역시 이상이 1933년, 이 집을 주택업자에게 판 뒤에 5개 필지로 쪼개져 도시형 한옥으로 다시 만들어지게 되기도 했죠. 현재 통인동 일대에 개관한 이상의 집은 후대에 다시 재건한 곳으로 이상의 시와 소설, 수칠, 서신 등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서촌에는 이상 뿐만 아니라 윤동주, 화가 이중섭과 이상범 등 예술가와 문인들도 이곳에 살았던 것으로 유명하죠.
이처럼 일제강점기부터 인구가 급증하던 서촌에는 아예 상설시장도 하나 들어서게 되는데, 오늘날 엽전으로 물건을 사는 관광명소로 유명한 '통인시장'입니다. 이곳은 1941년 일제강점기 때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공설시장에서 출발했죠. 이때는 이미 일제에 의한 화폐정리로 인해 엽전을 쓰던 시기는 아니었습니다만, 지금은 1개당 500원인 엽전 꾸러미를 산 뒤에 도시락통을 들고 반찬과 먹거리를 직접 사면서 다양한 시장음식을 경험할 수 있어 외국인들에게도 인기가 높은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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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활발하게 생동하던 도심지였던 서촌은 해방 이후부터는 시간이 멈춘 공간으로 남게 됩니다. 청와대가 지척에 있다는 이유로 건축규제가 강하게 유지됐기 때문에 재개발 물결에 휩쓸리지 않았기 때문이죠. 한옥 보존구역이 아닌 곳에서 간간이 볼 수 있는 빌라들도 그나마 규제가 다소 완화되면서 들어선 건물들입니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이라는 대오서점이나 서울문화재자료로도 등록돼있는 박노수가옥과 같은 오래된 건물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였죠.
하지만 이제는 이곳에도 젠트리피케이션의 물결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서촌이 북촌과 함께 많은 한옥건물이 보존된 관광명소로 부각되면서 골목마다 새로운 상권이 형성되고 있고, 임대료 상승에 따라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던 주민들이나 상인들은 점점 밀려나가고 한옥을 새롭게 개조한 카페나 상점들이 늘고 있죠. 얼마전 서촌에서 건물주와 임대료 문제로 폭행사건이 발생했던 것도 이곳이 서울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이 얼마나 심하게 일어나고 있는 곳인지를 보여줍니다. 18세기 이후 300년 넘게 지켜져 온 한양 서민들의 골목은 지금 가장 극심한 변화의 기로 위에 서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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