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가 있었어요.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남녘 대도시의 달동네 슬레이트 지붕집. 두 발 뻗으려면 가방 짐을 한 편으로 밀어야만 했던 작은 방 바로 옆, 소녀가 살았지요.
시골 중학교를 갓 졸업한 소녀는 '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꿈에 부풀어 도회지로 나와 섬유공장엘 취직했지요. 달동네 슬레이트집에서 비탈진 길을 한 동안 내려가면 다다르는 아주 큰 공장이었어요. 그 공장의 같은 반, 같은 조에서 근무하는 한 살 위 언니가 바로 소녀의 다정한 룸메이트였지요, 비록 작은 방이었지만.
소녀의 하루는 한결같았어요. 아침이면 6시 반 기상, 7시가 조금 지난 시각이면 수선을 떨며 방을 나섰지요. 어김없이 밤 10시 20분, 소녀가 귀가하면 마치 순서가 정해진 것 마냥 소리가 들렸지요, 짤깍 자물쇠 여는 소리, 스르륵 미닫이문 여는 소리, 사뿐 가방을 내려놓고 라면 봉지 뜯는 소리, 휴대용 가스레인지 물 끓는 소리, 양은냄비 바닥을 긁는 달그락 젓가락 소리…. 종종 소녀와 언니 간의 대화도 들렸지요. 공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어느 남자애가 눈길을 던졌는지 그리고 다음 월급날까지 얼마의 돈으로 버텨야 하는지….
그랬지요, 소녀와 저 사이에는 비밀이랄 것이 따로 없었어요. 달동네 슬레이트집이잖아요. 두 방의 사이에는 얇은 베니어합판 한 장에 덕지덕지 덧바른 벽지 정도가 있을 뿐이었으니까요. 굳이 듣고자 하지 않아도 모든 소리들이 다 들릴 수밖에 없잖아요.
적막 속에서 흐느끼는 소리. 베니어 벽 너머의 저는 그만 무엇도 할 수 없었어요, 어떤 말도, 어떤 행동도, 어떤 생각조차도. 그래요, '정의사회 구현' 구호 아래 1인당 국민소득 3천불 시대, '마이홈, 마이카' 꿈이 넘쳐흐르던 시대였잖아요.
30년이 지났어요. 1인당 국민소득 3만 불을 내다본다는 지금, 그 소녀는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요? 며칠 전의 광화문 광장, '이곳 광장에 서면 이 나라의 주인임을 느끼지만, 공장으로 돌아가면 소외감을 느낀다'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절규를 듣고서 그 소녀의 울음이 생각났어요. 달동네, 우물이 있던 슬레이트집의 그 소녀가 생각났어요. 모처럼의 휴무일이면 달빛 비친 우물에서 목욕물을 긷던 소녀. 잘 지내고 있을까요? 정말 잘 지내고 있을까요?
최강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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