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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 희망 한 단

최종수정 2020.02.11 16:36 기사입력 2016.12.30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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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 시인

윤제림 시인

 두 밤만 더 자면 새해입니다. 기막힌 일들이 너무 많아서 당최 '면목이 없을' 묵은해도 물러갈 채비를 하고 있을 것입니다. 달력은 한 해의 끝을 알리는데 어처구니없는 일들은 결말이 보이질 않습니다. 동지(冬至)도 지났으니 새 계절의 입구. 그런데도 어둠의 길이는 좀체 줄어들지 않습니다.

돌이켜보자니 하늘과 땅도 점점 무심해지는 것만 같습니다. 가을에 시작된 '지진'의 공포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딛고 선 땅도 흔들리고 꺼질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는데, 사람의 죄가 하늘에 닿아서일까요.

지난여름의 하늘은 얼마나 무서웠습니까. 그야말로 염천(炎天) 그 자체였습니다. '혹서(酷暑)'라는 단어의 뜻을 모두가 실감했지요. 누가 여름과 겨울 중에 어떤 계절이 더 나으냐 물으면, 저는 이제 망설이지 않고 이렇게 답합니다. "겨울이요. 얼어 죽더라도 저는 이제 겨울 편입니다."

추위는 용기와 투지를 키우지만 더위는 인간을 무력하게 만듭니다. 한파(寒波) 속의 이성은 얼음처럼 빛나지만, 한여름의 두뇌는 제 할 일을 잊어버리고도 부끄러움을 모릅니다. 자연히 진지한 생각은 피하게 됩니다. '논어'를 읽거나 공자님 말씀을 새기는 일은 다음 계절로 미루게 됩니다.

더위에 둔감한 편인 저도 참기 어려운 여름이었습니다. 실크로드에서 경험한 섭씨 40도의 기억을 자주 떠올렸습니다. 타클라마칸사막의 낙타를 생각하며 견뎠습니다. 화염산(火焰山)을 지나는 삼장법사와 손오공 일행도 생각났습니다. 그 무렵 제 곁의 어른 한분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더위 잘 간직했다가 겨울에 써."
[윤제림의 행인일기] 희망 한 단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던 여름이 아주 오래 전의 시간처럼 느껴집니다. 이렇게 겨울 깊숙이 들어와 있는 것도 무척 오래된 일 같습니다. 저처럼, 그래도 겨울이 낫다고 편을 들던 사람들도 벌써 마음을 바꿨을지 모릅니다. "그래도 여름이 낫지. 추운 것은 못 견뎌. 어디 기를 펼 수가 있어야지."

하늘땅 꽁꽁 얼어붙는 것을 사람 힘으로 어쩌겠습니까. 참고 이겨내야지요. 조금 더 오래 살아온 이들의 '말도 아니게 추웠던 옛날' 이야기를 곧이들으며 어깨를 펴야 합니다. 민초(民草)들의 내성(耐性)과 기개를 길러준 것도 '겨울공화국'의 시간이었음을 새삼스레 믿어볼 일입니다.

'희망 한 단'이란 노래가 있습니다. 원래는 시입니다. 타고난 감성으로 세상사를 나긋나긋 풀고 당기던 시인 김강태(1950-2003)의 작품입니다. 거기에 소리꾼 장사익이 곡조를 붙여서 시인 따라 하늘로 올라가려는 시를 지상에 내려앉혔지요. 올 겨울 이 답답한 세밑에 더욱 간절하게 와 닿습니다.

 … 춥지만, 우리/이제/절망을 희망으로 색칠하기/한참을 돌아오는
 길에는/채소 파는 아줌마에게 이렇게 물어보기//희망 한단에 얼마
 예요?

더위와 추위를 한 몸으로 받아낸 햇수만큼의 동그라미가 나무들의 나이테라지요. 인간의 몸에도 그런 표지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 끝없는 파문(波紋)의 형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를테면 절망과 희망이 밀물과 썰물처럼 끊임없이 일어났다가 꺼지면서 생겨난 문양.

그러나 그것들은 절대 그저 습관처럼 반복되어왔거나, 하릴없이 그려진 무늬가 아닐 것입니다. 힘들고 고단한 시간에 대한 도전과 성취의 흔적입니다. 당연히 우리가 이 겨울을 통과하는 방식 또한 막연한 기다림이어선 안 될 것입니다. '춥지만' 문을 열고 먼 곳을 바라볼 일입니다. 한 십리 바깥까지 나가 볼 일입니다.

시인과 가객(歌客)은 한 목소리로 권합니다. "겨울의 무채색을 봄 빛깔로 칠해나가자. '절망을 희망으로 색칠'해줄 사람은 따로 없다. 우리 스스로의 몫이다. 하늘 쳐다볼 일도 아니고, 땅을 파고 있을 일도 아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희망이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한다."

물론 제멋대로의 해석이지요. 하지만 틀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시 '희망 한 단'에 덧붙인 장사익의 노랫말은 바로 그런 생각의 표현일 것입니다. '애드리브(ad lib)'라 해도 좋고 능청이라 해도 좋을 이 대목. "희망유? 나두 그런 거 몰러유. 그냥 채소나 한 단 사가시유. 선상님."

'채소나 한 단!' 충청도 광천(廣川)장에 가면 만날 것 같은 아주머니의 희망입니다. 동네 상인들과 가난한 이웃들의 소망입니다. '꿈'의 구체적 목록입니다. 희망은 이념적 구호 속의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오늘 저녁 식탁과 내일 아침의 평화에 대한 믿음입니다.

희망의 생산지는 일출(日出)의 동해안이 아닙니다. 하수상한 시절을 기회 삼아 몸값 좀 올려보려는 정치꾼들의 '다이어리'도 아닙니다. 희망은 '국정(國定)'이나 '검인정(檢認定)'의 어휘가 아닙니다. 그저 '한참을 돌아오는 길'목에서 채소를 파는 아주머니의 때 절은 전대(纏帶)에서 나오는 '한 마디'입니다.

윤제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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