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만리]동해의 거친바람도 기대는 언덕배기의 삶
조용준의 여행만리-가난하고 고단했던 삶의 풍경, 묵호 논골담길을 가다
논골담길은 벽화 마을이 아니다. 벽화는 묵호항에 기대어 살던 논골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도구일 뿐이다. 전선이 어지럽게 지나가지만 처마와 처마가 잇닿은 골목의 담벼락마다 고단했던 시절 삶의 흔적이 가득하다.
[아시아경제 조용준 여행전문기자]아주 잘나가던 항구였습니다. 삼척, 태백 지역의 무연탄을 수송하는 무역항으로 번성했습니다. '거리의 개들도 1만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닌다'고 할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사람들은 넘쳐나고 밤새 불빛이 꺼지지 않는 시절이었습니다. 동해 묵호항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사람들이 떠나고 불빛도 하나둘 꺼졌습니다. 쇠락한 항구를 힘겹게 지탱한 건 생선 좌판을 펼치고 앉은 잔정 많은 어머니들입니다. 그런 묵호항이 달라졌습니다. 묵호항이 내려다보이는 비탈진 산동네에 논골담 벽화길이 만들어졌습니다. 뱃일과 해산물 건조 등을 하며 살아온 주민들의 애환을 그린 벽화들이 촘촘합니다. 머리 위로 전선이 어지럽게 지나가지만 처마와 처마가 잇닿은 골목의 담벼락마다 삶의 흔적이 가득합니다. 가난했던 시절 삶은 고단했지만 가슴이 뭉클해지는 그림들입니다. 동해에는 논골담길 말고 유명한 게 또 있습니다. 애국가 배경화면의 일출 장면으로 이름난 추암 촛대바위입니다. 해변 끝자락 언덕에 올라 내려다 본 추암의 밤바다는 낮보다 황홀하고 아름다움 그 자체였습니다. 바다를 앞마당으로 삼은 절집 감추사와 고불개 해안으로 이어지는 소나무 숲길은 고즈넉합니다. 닷새마다 열리는 북평장도 낡고 누추하지만 정 넘치는 풍경 그대로입니다. 무릉계곡의 봄은 또 어떻습니까. 무릉반석과 쌍폭포 그리고 나무들은 한창 물이 올라 탱글탱글합니다.
묵호항은 한때 잘나가던 항구다. 1980년 이전 무연탄을 수송하는 무역항으로 번성했다. 사람들도 많고 밤새 불빛이 꺼지지 않았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석탄산업이 쇠락하면서 사람들도 떠났다. 그런 묵호항이 최근 달라졌다. 옛 시절 이야기와 희망 없는 미래만 남았던 이곳에 사람들이 모여든다. 묵호항이 내려다보이는 논골마을에 2010년 '논골담길'이 만들어지면서부터다. 비탈진 논골마을과 어달리 일대의 산동네 담벼락마다 벽화를 그렸다. 산비탈에 다닥다닥 붙은 작고 허름한 집들이 만들어낸 좁고 미로 같은 골목이 작품이 됐다.
논골담길에 벽화는 있지만 벽화 마을은 아니다. 벽화는 묵호항에 기대어 살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도구일 뿐이다.
논골1길과 2길, 3길, 등대오름길로 구성된 논골담길은 어느 곳으로 올라가도 묵호등대에 닿는다. 거미줄처럼 얽힌 마을길을 빠짐없이 둘러봐야 논골마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림 하나하나에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논골마을의 역사는 묵호항이 열린 194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뱃일이나 허드렛일을 마다치 않은 사람들이 모여 언덕배기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삼척과 태백의 석탄과 동해에서 생산된 시멘트를 실어 나르면서 전성기를 맞았다. 사람들이 몰렸고 언덕에는 벽돌과 슬레이트로 지은 집이 들어찼다.
논골마을의 벽화 가운데 유난히 눈에 띄는 오징어와 명태, 장화는 마을 사람들에게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다. 언덕의 가장 높은 곳에는 오징어와 명태를 말리는 덕장이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묵호항으로 들어온 오징어와 명태를 지게나 빨간 고무 대야에 담아 덕장으로 날랐다. 언덕 꼭대기 덕장으로 오르는 길은 늘 질퍽해서 '마누라, 남편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고 했을 정도다. 지금은 시멘트 길이지만 당시에는 흙길이어서 논처럼 질퍽거리기 일쑤였다고 한다. 논골이란 이름도 거기에서 유래했다.
벽화에 그려진 건 삶이 진득진득 묻어나던 당시 묵호의 모습이다. 논골담의 마을 주민들의 삶은 고단했지만 돌이켜보면 가난과 상처를 이웃들과 기꺼이 나누던 따스한 풍경이 있던 시절이었다. 산동네의 노란 전구가 묵호의 밤바다를 푸르게 비추는 등대, 빨랫줄에서 말라가는 오징어…. 전깃줄 어지러운 골목 아래 구멍가게와 오래전 묵호 극장의 모습도 거기 그려져 있다.
산비탈을 내려서자 바닷바람이 거세게 몰아친다. 담벼락에 그려진 글귀가 마치 한 줄의 시처럼 뭉클하게 가슴을 파고든다. '바람이, 언덕을 향하는 이유는 숙명처럼 기다리는 언덕배기의 삶을 차마 외면할 수 없기 때문….'
논골담길 정상에는 묵호등대가 있는 묵호등대해양문화공간이다.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 시비 너머로 1963년 처음 불을 밝힌 높이 21.9m의 묵호등대가 서있다. 묵호등대의 나선형 계단을 숨 가쁘게 오르면 사방이 탁 트여 일망무제의 바다가 펼쳐진다.
묵호등대에서 길을 따라 내려가면 이승기, 한효주가 주연한 '찬란한 유산'에 나온 출렁다리를 만난다. 출렁다리에서 해안도로로 내려가거나 다리를 건너 직진하면 서울 남대문의 정동쪽으로 알려진 까막바위에 이른다.
논골담을 나와 추암해변으로 가는 길에 한섬해변을 찾아보자. 탁 트인 해변 양쪽의 우뚝 선 바위경치도 멋스럽지만, 왼쪽 언덕길에 만나는 울창한 소나무 숲길이 인상적이다. 아담한 정자 관해정 앞을 지나 바위 경치가 아름다운 해변 고불개로 이어지는 솔숲길이다. 길에서 수직으로 내려다보는 해안 절벽과 바위 경치도 볼만하고 솔바람에 실려 오는 봄기운이 상쾌하다.
추암은 동해시의 가장 남쪽에 자리 잡은 해변이다. 삼척의 증산해변과 이웃해 있다. 장엄한 일출 광경이 애국가의 첫 장면을 장식하면서 일출 명소로 알려진 곳. 추암 촛대바위는 예부터 유명했다. 1788년 단원 김홍도가 정조의 명을 받아 그린 화첩 '금강사군첩'에도 등장한다. 김홍도는 이곳 전망대에 올라 촛대바위와 주변 기암절벽을 상세히 묘사했다.
촛대바위는 전망대에서 보는 것도 좋지만 추암해변 끝자락에서 보는 것이 더 운치 있다. 해변 끝 해안 절벽을 따라 삼척 증산해변까지 데크가 조성돼 있다.
동해는 백두대간의 두타산(1353m)과 청옥산(1404m)을 품고 있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던가. 기골이 장대한 두타산과 청옥산의 수많은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이 계곡을 이루는데, 신선이 산다는 무릉도원을 본떠 무릉계곡이라 부른다.
1000명이 앉아도 넉넉하다는 무릉반석을 지나 무릉계곡의 명소 쌍폭포와 용추폭포까지 다녀오는 트레킹을 빼놓을 수 없다. 삼화사와 학소대를 지나 용추폭포까지 약 3㎞ 거리다. 울창한 숲이 에워싸고 가파르지 않아 쉬엄쉬엄 다녀오기 좋다. 용추폭포에서 하늘문, 관음사를 거쳐 내려오는 코스도 권할 만하다. 가파른 철 계단에 서면 두타산과 청옥산의 굵직한 산줄기와 기암절벽이 쉼 없이 이어진다.
동해(강원도)=글 사진 조용준 여행전문기자 jun21@
◇여행메모
▲가는길=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강릉갈림목에서 동해고속도로로 갈아타 망상나들목으로 나간다. 동해ㆍ묵호 방면으로 우회전해 7번 국도를 타고 사문삼거리를 지나 발한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묵호항과 논골담길이 나온다.
▲볼거리=동해 시내 볼거리 중 가장 잘 알려진 곳이 천곡동굴이다. 1991년 아파트 건설공사 중에 발견돼 1996년부터 일반에 공개된 천연 석회암동굴이다. 이어 3, 8일에 장이 서는 북평5일장은 100여년의 세월 이어온 전통 5일장이다. 이 외에도 망상해변, 동해고래화석박물관, 감추사 등이 있다.
▲먹거리=묵호항 활어회센터(사진)에서 생선을 사면 손님들이 산 생선을 회로 썰어주는 곳이 있다. 10여명의 아주머니들이 펄펄 뛰는 생선을 잡아 순식간에 회로 만들어내는 솜씨가 일품이다. 천곡동의 '한우설렁탕(033-532-1589)'은 현지 주민들은 물론 외지 사람들에게도 이름난 맛집이다. 일요일은 휴무다. 유정청국장(033-533-7222)의 청국장정식이나 대보삼계탕(033-531-5500)의 순댓국도 소문났다. 묵호항 신협 옆 건물 2층의 장칼국수집(대우칼국수)도 유명하다. 고추장을 푼 얼큰한 장칼국수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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