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빈치와 메디치家를 둘러싼 '大반전'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메디치 가문의 사연
[아시아경제 김철현 기자] "한국의 메디치 가문'으로 발돋움하겠다." 인문학과 문화ㆍ예술을 지원하는 많은 기업들이 밝히는 포부다. 그 만큼 '메디치'는 메세나 활동에 공을 들이는 기업들에게는 영예로운 이름이다. 메디치가(家)는 15~17세기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가장 유력하고 영향력이 높았던 가문으로 실질적인 통치자였다. 또 지속적으로 인문학과 문화ㆍ예술 분야를 후원해 르네상스를 꽃 피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았으며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보티첼리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 하지만 다빈치가 30대와 40대를 보내며 '최후의 만찬' 등을 그린 곳은 메디치 가문이 지배하던 피렌체가 아닌 밀라노였다. 여기에는 어떤 사연이 숨겨져 있을까.
15일 레오나르도 다빈치 탄생 563주년을 맞아 그의 생애와 작품에 대해 다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다빈치의 작품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르네상스와 메디치 가문이다. 하지만 다빈치는 가장 왕성하게 예술가를 후원했던 로렌초 데 메디치 집권 시에 피렌체를 떠나 밀라노에서 새로운 후원자를 만나야 했다.
이 같은 다빈치와 메디치의 관계를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메디치 가문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메디치는 피렌체의 평범한 중산층 가문이었지만 은행업으로 부를 쌓아 사실상 피렌체를 지배했다. 부와 함께 권력까지 거머쥔 메디치가의 시작을 알린 이는 조반니 디 비치였다. 이어 그의 아들인 코시모 데 메디치는 유럽 전역에 은행을 세우고 교황청의 자금 유통을 맡아 막대한 부를 쌓았다.
메디치 가문의 번영은 코시모의 손자인 로렌초 데 메디치가 집권했을 때 정점에 달했다. 로렌초는 폭넓은 인문학적 교양을 갖추고 있었고 특히 철학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피렌체의 르네상스 문화가 최고조에 이른 것도 이때이며 다빈치 역시 젊은 날을 로렌초와 함께 피렌체에서 보냈다.
하지만 다빈치는 서른이 되던 1482년 피렌체를 떠나 밀라노로 향한다. 그의 밀라노 행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다. 우선 당시 교황 식스투스4세가 예배당의 내부 벽화 장식을 위해 화가들을 수배할 때 교황과 적대적이었던 로렌초는 관계 개선을 위해 피렌체의 대표 화가들을 파견하는데 여기에 다빈치는 포함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는 워낙 다양한 분야에 출중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다빈치가 일을 마무리하기 전 다른 작업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잦아 미완의 작품이 많았고 이 때문에 로렌초의 신뢰를 얻지 못했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다빈치가 다른 후원자를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빈치의 천재성을 발견한 로렌초가 그를 밀라노에 특사로 보냈다는 견해도 있다. 교황의 예배당 장식을 위해 피렌체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을 보내고 교황을 견제하는 데 돌발 요소가 될 수 있는 밀라노에는 젊은 다빈치를 보냈다는 것이다.
여하튼 다빈치는 밀라노를 지배하던 루도비코 스포르차를 새로운 후원자로 얻게 되고 17년간 밀라노에 머물게 된다. 이 시기에 '최후의 만찬' 등 그의 대표작이 그려지고 독보적인 기계장치들에 대한 아이디어도 탄생했다.
다시 메디치 얘기로 돌아와서 로렌초는 다빈치가 밀라노로 떠나고 나서 10년 후인 1492년 통풍으로 사망한다. 그의 죽음과 함께 메디치가는 기울기 시작하는데 아들 피에로는 프랑스 군이 침입하자 싸워보지도 않고 피렌체를 넘겨줬다가 시민들의 공분을 사 망명을 택한다.
메디치 가문의 활동 무대도 로렌초의 차남인 조반니가 교황(레오 10세)에 오르면서 바티칸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후 로렌초의 조카가 교황(클레멘스 7세)이 되는 등 가문의 명성을 이어가지만 17세기 영향력이 줄게 되고 1737년 토스카나 대공국의 마지막 군주 잔 가스토네 데 메디치의 죽음으로 메디치 혈통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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