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피 가치는 이미 땅을 뚫고 내려갔다. 1달러에 67루피선까지 내려갔다. 일각에서는 70루피 혹은 75루피까지 갈 것이라는 전망도 이미 나왔다. 통화가치 하락은 수출품의 달러 표시 가격이 낮아져 수출이 잘될 수도 있어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 없다. 반대로 수입물품 가격을 올려 물가를 치솟게 해 '없는 자'를 괴롭힌다. 루피는 후자 측면이 강하다.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양적완화 축소 방침을 시사한 5월 이후 미국 자본은 신흥시장 탈출을 시작했다. 양적완화로 3조9000억달러 이상의 외화가 신흥국으로 몰려들며 주가와 채권,부동산 가격이 올랐다. 신흥국들은 자기가 잘해서 그런 줄 알았다. 착각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그래서 흥청망청 썼다.
부족한 돈은 빚을 내 썼다. 인도의 경상수지적자는 지난 회계연도에 국내총생산(GDP)의 4.8%인 882억달러였다. 올해는 700억달러로 줄인다는 목표를 세웠지만 달성 가능성은 낮다. 착각이 깨지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4년이면 족했다. 루피를 비롯한 신흥국 화폐는 양적완화 축소에 추풍낙엽처럼 떨어졌다. 피땀 흘려 쌓아 둔 외환보유고가 있었기에 그나마 버텼다. 신흥국 보유고는 빠른 속도로 감소했다. 인도는 국채 발행, 통화스와프 협정 체결 등 보유고 확충 방안을 검토하기 시작했지만 때늦은 감이 없지 않다. 1991년식의 외환위기는 없다지만 빈말로 끝날 공산이 크다.
지난 22~24일 미국 와이오밍주 잭슨홀에서 열린 캔자스준비은행 연례 컨퍼런스인 잭슨홀 미팅에 참석한 제임스 불러드 세인트루이스 연준은행장은 블룸버그 라디오 인터뷰에서 "미국 경제가 정책의 1차 목표"라고 못 박았다. 그는 "신흥시장 변동성을 근거로 정책을 입안하지 않는다"고 자르듯 말했다.
부인하고 싶지만 미국은 '절대 갑'이요 신흥국은 '절대 을'임은 하나의 사실이다. 이런 현실에서 신흥국은 무엇을 해야 할까. 경제기초여건이 좋다는 식의 발언을 해 봐야 소용없다. 1990년대 말 한국의 외환위기에서 효용성이 없음은 이미 판결났다.신흥국들이 당장 해야 할 일은 그동안 해 온 일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바로 외환보유고를 쌓는 일이다. 미국 언론들이 중국의 국가부채를 들먹이고 있지만 중국 위안화 가치가 상승한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3조5000억달러의 외환보유고 위력이다.
한국이 3300억달러, 브라질이 3740억달러 등 신흥국들은 저마다 적지 않은 외환보유고를 쌓아 놓았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자본시장에 막대한 외국인 자금이 들어와 있다는 지적 역시 맞는 말이다. 이 자금이 일거에 빠져나가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것까지 대비하려면 더 쌓아야 한다. 비용이 더 들더라도 위기를 당해 비싼 금리를 주고 돈을 꿔다 쓰고 국민 혈세로 키운 회사를 파는 것보다 낫다. 더욱이 주식과 채권, 외환에 투자하는 헤지펀드들의 운용자산 규모에 견줘 보면 신흥국의 보유고는 새 발의 피다.
적정 외환보유고가 얼마라느니, 수익도 나지 않는데 더 쌓아 봐야 뭣하느냐는 식의 논란은 금물이다. 그것은 신흥국을 파멸시키려는 메피스토펠레스의 감언이설이요 경계 대상이다. 믿을 것은 주머니 속 달러뿐이다.
박희준 선임기자 jack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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