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여름, 무대에 오른 연극
[아시아경제 김수진 기자]독특한 연극 두 편이 늦여름 무대에 오른다. 5년만에 국내에서 재상연되는 '필로우맨', 배우 고두심이 역시 5년만에 연극으로 돌아온 '댄스레슨'이다. '필로우맨'은 공포와 절망감, 위트가 절묘하게 공존하는 작품으로 가상보다 무서운 현실을 서늘하게 그려냈다. 반면 '댄스레슨'은 춤을 소재로 경쾌하고 사랑스러운 두 남녀의 연대를 보여준다. 관객으로서는 취향이 다른 두 연극을 두고 즐거운 고민을 하게 된다.
◆5년만에 재상연되는 '필로우맨'=연극 '필로우맨'(연출 변정주)은 어느 취조실에서 시작된다. 안대로 눈을 가린 소설가 카투리안(김준원)을 형사반장 투폴스키(손종학)와 젊고 폭력적인 형사 에리얼(조운)이 취조중이다. 최근 발생한 두 아이의 살인사건은 카투리안이 쓴 단편소설의 내용 그대로다. 한 아이는 발가락이 잘렸고, 또다른 한 아이의 목구멍에서는 면도날이 발견됐다. 카투리안의 소설 속에 묘사된 죽음과 똑같다.
형사들은 이 두 살인 사건과 지금 수사중인 어린이 실종사건 모두 카투리안과 그의 형 마이클(이현철)이 공모한 것이라고 확신한다. 카투리안의 '이야기'는 일종의 지시였고 뇌손상으로 지능이 떨어지는 마이클은 실행자 역할을 맡은 게 아니냐는 것이다.
카투리안이 쓰는 소설은 비틀린 동화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연극의 제목과 같은 이야기 '필로우맨'은 극을 이끌어가는 주축이 된다. "아주아주 오랜 옛날, 한 남자가 살았어요." 흔한 동화로 시작되는 연극 속 이야기는 곧 전복된다. 베개로 만들어진 '필로우맨'은 아이들을 행복한 자살로 유도한다. 언젠가 인생은 반드시 불행해질 것이기에 아픈 시련을 먼저 피할 수 도와주는 것이다. 어쨌든 결론은 끔찍한 죽음이다.
마이클이 그랬을 리 없다고 범행을 부인하던 카투리안은 곧 자신의 형이 '필로우맨'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어둡고 잔인한 카투리안의 소설을 현실로 옮긴 마이클은 이야기가 지닌 힘을 증거하는 인물이다. 예수가 되고자 했던 소녀의 죽음을 다룬 '작은 예수', 부모를 죽여야 했던 자신의 과거를 담은 자전적 이야기 '작은 예수'등 연극 속에는 모두 7가지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카투리안이 풀어 놓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연극의 굵은 주제를 드러내는 상징이다. 단순한 수사극 형태를 취한 극의 내러티브와 극 속의 이야기가 충돌하며 분열과 결합을 반복하는 전개는 2시간 40분의 러닝타임 내내 쾌감을 준다.
마지막 총탄이 날아들지만 '이야기'는 결코 죽지 않는다. 카투리안은 자신의 이야기가 불멸로 남는 것을 목격한다. 카투리안은 죽음을 앞둔 7과 3분의 4초동안에도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이야기로 재구성한다. 카투리안의 끈질긴 집념이야말로 극의 진짜 반전이다.
2007년 국내 초연에서는 배우 최민식이 카투리안을 연기하고 박근형 연출가가 연출을 이끌었다. 5년만에 재상연되는 이번 '필로우맨'은 변정주 연출가가 6개월간 원작자 마틴 맥도너와 호흡을 맞춰 번역했고 네 주연 배우들의 연기 앙상블 역시 초연에 뒤지지 않는다. 9월 15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
◆두 명의 소외된 남녀가 있다. 보통은 이런 설정에서 금세 로맨스가 싹트지만 '여섯주동안 여섯번의 댄스레슨(댄스레슨·연출 김달중)'은 설정에서부터 조금 다르다. 여주인공인 릴리(고두심)는 정년 퇴임한 70대 교사이자 목사의 아내였다. 남편은 6년 전 세상을 떠났으나 릴리는 여전히 자신의 삶의 그어 놓은 선 안에서 보수적으로 웅크린 채 살아간다. 그러나 춤을 배우기로 한 결정이 릴리의 일상을 뒤흔든다. 릴리에게 뛰어든 남자는 게이 댄스강사 마이클(지현준)이다. 춤을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에서 이들은 모두 변한다.
'댄스레슨'은 상투적 로맨스 전개로 나아가기보다 두 사람이 서로의 인생을 이해하고 '가장 소중한 사람'으로 독특한 우정을 쌓아가는 길을 택했다. 릴리와 마이클은 가슴에 안고 있던 상처를 고백하고 서로에게 거침없는 충고를 건넨다. 그들은 각자에게 삶의 동반자가 된다. 나이와 성별과 살아온 차이를 뛰어넘는 이 관계는 사랑 그 이상이다.
배우 2명만이 등장하며 갈등을 소화해내는 2인극에서 두 배우는 뛰어난 호흡을 보여준다. 올해 61세인 배우 고두심은 2007년 '친정엄마' 이후 5년만에 데뷔 40주년 기념으로 무대에 섰다. '제6회 더 뮤지컬 어워즈'에서 남우신인상을 수상한 신인 지현준(34)와의 조합이 어색하지 않다. 특히 지현준은 게이 청년 마이클을 연기하며 '끼'를 제대로 보여준다. 극 중 등장하는 폭스트롯과 스윙, 탱고 등 여러가지 춤을 고두심과 지현준이 매끄럽게 소화해내는 모습은 꽤나 구경거리다.
중년 여성 관객들을 주요 관객층으로 삼은 만큼 객석에도 다양한 연령층이 눈에 띈다. 기존의 최루성 모녀극과는 궤를 달리하는 작품이다. 2001년 미국에서 초연된 리처드 알피에리의 작품이 원작으로 지금까지 12개국 언어로 번역됐다. 한국에서는 이번이 첫 공연이다. 9월 2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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