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 내세운 모토는 '외우기 시합 끝' '암기식 문제 탈피'였다. 17개 과목까지 시험을 치렀던 종전의 학력고사는 단편적 지식을 주입하는 입시 폐단의 주범이라는 말을 들었다. 암기 경쟁에 교육이 함몰되고 있다는 지적이 계속됐고, 한두 문제 차이로 수만, 수십만 명 수험생의 운명이 갈리는 것 역시 타당하지 않다는 비판이 나왔다.
수능 출범의 산파역을 맡았던 박도순 고려대 명예교수(83)는 "수능은 폭넓은 사고력을 측정하고, 대학서 수업받을 능력만 재면 된다는 취지로 출발했다"고 했다. 사회의 기대도 컸다. 당시 주요 신문 1면에는 수능에 대해 '탈교과 통합출제 산교육' '비정상 교육풍토 쇄신' 등의 제목이 달렸을 정도다.
박 명예교수는 노태우 정부 시절인 1990~1992년 일곱 차례 실험 평가를 거쳐 지금의 수능을 도입했다. 이후 13차례 세부적으로 변경되긴 했지만 32차례 수능이 시행됐다. 그런데 도입 취지에 들어맞게 운영된 적은 "도입 첫해 딱 한 번"이라고 했다.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자신이 낳은 수능의 비판자가 된 '수능의 설계자' 박 명예교수를 이달 초 경기도 성남시 분당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수능은 원래의 취지로 돌아가야 한다"며 "대학에서 수업받을 능력이 되는지를 볼 수 있는 자격검사로만 쓰고 줄세우기식 상대평가가 아닌 절대평가로 바꿔야 한다"고 했다. 그는 수능의 수술을 통해 "대학 스스로 원하는 인재를 선발하도록 하고 정부 관여는 최소화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학생 선발은 대학 자율에 맡기는 것이 글로벌 표준"이라는 것이다.
'대학 강의 들을 수 있나' 판단하려던 시험교과 이기주의에 과목 추가돼정권 때마다 수능 바뀌면서 변질

-지금 수능은 공정한 시험이 아닌가.
▲공정하다는 기준은 타당성을 전제로 한다. 누구든지 그 기준을 받아들일 때 가능하다는 얘기다. 키를 측정해서 선발한다고 치자. 0.001㎜까지 재서 줄을 세운다. 이것은 공정한가. 당장 '왜 키로 줄 세우냐' 할 거다. 수능도 마찬가지다. 수능은 결과 값을 지금처럼 입시 당락을 좌우하는 유일한 가늠자로 쓰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에서 만들어졌다. 예를 들어 100점 만점에 60점만 넘으면 대학 입학 자격을 부여하는 시험이었다면 60점 넘은 사람은 다시 시험 볼 일은 없다. 그런데 이 시험으로 당락을 결정하라고 하니 시험을 보고 또 보고 한다. 크게 잘못됐다.
-시험에는 '변별력'도 필요한 요소가 아닐까.
▲수능은 원래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정상적으로 이수한 사람이면 누구나 정답을 알 수 있는 통합 교과적인 문제를 내자고 만든 시험이다. 수능 실시 전 일곱 차례 실험평가를 했는데 피검사자들이 '너무 쉽다'고 했다. 정답 맞힌 이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난이도 문제는 통계적으로 학생들의 성적이 정상 분포를 이뤘을 때 적절한 난이도라고 한다. 그런데 일반의 관심은 늘 상위권 내 분포만 따지는 데 있다. 하위 30% 중에서도 0점, 10점대가 있는데 이 그룹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변별력이라고 하는 것도 개념 자체가 틀렸다. 변별력이란 대학에서 공부할 능력을 갖추고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면 되는 것이다. 절대평가로 따져볼 수 있다. 100명이 다 맞든, 틀리든 상관이 없다는 얘기다. 그런데 서열을 정하는 개념으로 변별력이 쓰이고 있다. 이 기준에 맞춰가다 보니 수능이 변질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사교육 증가 등 수능 부작용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다.
▲입시제도 전반에 대한 얘기를 빼고 수능만 탓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수능 때문에 N수생이 늘었느냐 하면 그렇다고 볼 수 없다. 수능이 없던 전두환 정부 때도 '삼수 감점제(1979년 대학 입학 예비고사부터 적용·삼수생 이상은 점수에서 3점 감점)'가 있지 않았나. 수능의 장기적 개선 방향을 논의하려면 대입전형의 발전 전망을 해야 하고, 그 속에서 향후 수능이 어떤 위상을 갖게 될 것인지를 바라봐야 한다.
-대입제도를 바꿔야 한다는 뜻인가.
▲그 전에 대학을 어떻게 바라볼지가 선행돼야 한다. 목적론적 시각에서 보면 대학은 인재를 길러내는 곳이다. 소위 엘리트를 양성한다고 하지만, 이는 대학 진학률이 30% 이하일 때나 하는 말이다. 지금은 고교 졸업 후 90%가 대학에 간다. 이런 사회에서 대학은 엘리트 양성 기관이 아니라 보편 교육을 위한 곳이어야 한다. 교양을 갖추는 곳이란 얘기다. 기능적 시각에서 보면 대학은 좋은 직업을 얻기 위한 곳이다. 우리 사회에선 대학을 이 둘의 시각에서 보는 경향이 짙다. 그러나 다른 시각에서 보면 대학은 배움 자체를 추구하기 위한 공간이다. 교육이 행해지는 이유는 단순하다. 재미있어서다. 이런 경우에는 입시가 목적이 될 수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교육을 서열화한다. 소수정예만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든다. 사교육이 과열되는 것도 결국 서열화에서 비롯된다.
중등교육과 고등교육 간의 관계도 생각해야 한다. 중등·고등교육별로 교육목적, 교육과정이 다른데 우리는 대학을 상부, 중·고등학교를 하부 구조에 놓는다. 그렇다 보니 수능이 바뀌면 중고 교과과정이 바뀐다. 일례로 한국사가 그렇다. 박근혜 정부 때 국사가 중요하다면서 교육과정에서 이를 다루기도 전에 곧장 수능 과목에 포함해 버렸다. 입시만 보고 대입제도를 고치다 보니 생기는 현상이다.
수능, 대입의 유일한 잣대 되어선 안돼자격요건으로만 활용해야각 대학이 원하는 인재 뽑도록대입에서의 정부 역할 줄이기 필요

-어떻든 지금의 수능은 변화가 불가피해진 것 같다
▲절대평가로의 전환은 수능이 가지고 있던 무의미한 점수 변별력을 '능력 변별'로 바꾸는 시도다. 학생부의 활용을 보다 극대화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현행 수능에선 매년 상대적인 변별을 위해 난이도에 온 신경을 쏟는다. 절대평가를 하게 되면 난이도 논의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수능 결과를 현재처럼 상대평가로 한다는 뜻은 수능 결과에 따라 학생 서열화를 강조하는 것이고, 이것은 수능에 의한 한 줄 세우기를 통해 학생을 선발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수능 점수가 반드시 대학에 다녀야 할 학생을 구별해내지 못한다는 점이다. 수능 결과는 대학 입학 적격자 선정의 한 부분인 학업 기초 능력을 가려내는데 부분적으로만 기여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찍기식 오지선다형 시험에 대한 비판도 크다.
▲수능의 가장 큰 결함이 선다형 형태라는 점이다. 창의성 교육을 하려면 주관식 시험 형태로의 전환을 고려해야 한다. 주관식 형태를 추가함으로써 수능의 큰 약점을 보완할 수 있다. 채점에 어려움이 있을 순 있지만 대부분의 나라에서 시행하고 있다. 수능 문제를 문제은행으로 출제해서 출제의 오류도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 수능이 공통 기본능력을 재는 것으로 바뀌면 교육과정이 변한다고 해도 덜 민감하게 된다. 입시에서 수능의 영향력이 최소화되고 입시 경쟁이 낮아지게 되면 문제은행을 통한 출제는 탄력을 받을 수 있다.
-입시 폐해도 줄일 수 있나.
▲본질적인 방향은 아니지만 이처럼 수능이 개선된다면 사교육비 과잉지출이 조금이라도 줄고 중등학교 교육이 입시 영향에서 지금보다는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과도한 경쟁과 서열 체제가 가져다주는 불합리한 교육 풍토도 부분적으로나마 개선될 것이라고 본다.
박도순 고려대 명예교수는
박 명예교수가 도입하려고 했던 수능의 원래 모습은 언어 능력과 사고력을 측정하는 '적성검사' 형태였다. 그는 당초 대학 입시에서 수능은 학생 평가 자료로만 쓰고, 선발은 각 대학이 논술과 면접 등을 통해 자율적으로 뽑도록 하는 구조를 생각했다고 한다.
박 명예교수는 수능 출제기관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평가원)의 초대 원장을 1998년부터 2000년까지 지냈다. 노태우 정부에서 시작해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교육정책 관련 자문을 맡았다. 제36대 한국교육학회장, 제8대 교육평가학회장을 역임하는 등 우리 교육계의 산증인이다.
목차한국의 교육, 길을 잃다
- 12년간 9번 입시 롤러코스터, 불운의 고3 황금돼지띠
- '수능 설계자'의 수능 비판 "교과 이기주의와 정치적 개입에 변질"
- “정답 없는 교실, 발표가 두렵지 않아요”
- "거점국립대 우뚝 세워 서울대 10개 만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