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현지시간) 라트비아 벤츠필스항에 정박한 유조선의 모습. 벤츠필스항 인근 공해상에서 러시아산 석유를 섞어 판매하는 석유는 '라트비아 블렌딩'이라 불리고 있다. [이미지출처= 로이터·연합뉴스]

23일(현지시간) 라트비아 벤츠필스항에 정박한 유조선의 모습. 벤츠필스항 인근 공해상에서 러시아산 석유를 섞어 판매하는 석유는 '라트비아 블렌딩'이라 불리고 있다. [이미지출처= 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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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 최근 미국과 서방의 대러제재의 가장 큰 구멍으로 지적되고 있는 용어로 ‘블렌딩(blending)’이 있다. 글자 그대로 ‘뒤섞는다’는 뜻의 이 단어는 석유업체들이 공해상에서 러시아산 석유를 몰래 섞어 파는 관행을 일컫는 말이다. 러시아산 석유 비율이 50%만 넘지 않으면 제재 대상에서 제외되는 점을 악용한 수법이다.


원래 블렌딩은 18세기 영국의 홍차 밀매상들에게서 유래한 단어로 알려져 있다. 당시 영국 정부는 중국과의 홍차 무역권을 공기업인 동인도회사에서 독점토록 했고, 동인도회사는 높은 가격에 홍차를 판매해 영국 왕실과 정계의 정치자금을 대고 있었다. 결국 값비싼 홍차를 먹기 어려운 서민들은 밀수된 차를 마실 수밖에 없었다.

밀수업자들은 당국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중국산 홍차에 값싼 향신료나 허브를 넣고 다른 상품이라며 원산지를 속였다. 아라비아의 베르가모트 향신료를 넣은 얼그레이를 비롯해 각종 허브티들도 이렇게 탄생했다.


그나마 홍차 블렌딩은 규모가 크지 않아 영국 정부도 눈감아 줬지만, 문제는 홍차의 가장 큰 경쟁상대였던 커피였다. 당시 커피는 영국과 적대국인 스페인령 서인도제도에서 나오고 있어 영국 정부는 커피 금수조치를 내렸다. 여기에 더해 동인도회사는 의회를 움직여 영국 본국은 물론, 아메리카 식민지에서까지 커피수입을 원천 차단해 버렸다.

하지만 제재가 장기화되고 영국 정부가 재정난 타개를 위해 홍차에 세금까지 붙이면서 미국 상인들은 네덜란드 밀수업자들과 카리브해에서 이른바 ‘커피 블렌딩’을 하기 시작했다. 커피 블렌딩은 여러 원산지의 커피를 뒤섞어 어디에서 온 커피인지 알 수 없도록 만드는 작업이었다.


네덜란드 밀수업자들은 당시 제재 대상이 아니던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산 커피에 서인도제도에서 나온 커피를 섞어 판매했다. 혼합 커피가 들어오면서 미국인들은 서로 다른 향을 중화시키고자 물을 타먹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아메리카노’가 탄생한 배경이 됐다고 한다. 영국 정부는 이 커피 블렌딩에 강하게 반발했고, 미국 독립전쟁의 도화선이 됐다.


이처럼 수백 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블렌딩은 오늘날에도 제재와 금수조치를 피하는 주된 수단이다. 현재 러시아산 석유도 섞는 지역에 따라 일명 ‘라트비아 블렌딩’ ‘네덜란드 블렌딩’ 등으로 불리며 시장에 여전히 공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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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유럽의 일처럼만 느껴지지만, 실제 국제사회에서 가장 골치아픈 블렌딩 전문 국가는 북한이다. 북한의 탄도미사일을 비롯한 각종 무기류가 다른나라 무기들과 뒤섞여 이란과 중동 테러조직들에 넘어가고 있다. 특히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북한에서 러시아로 무기가 넘어갈 것을 국제사회가 우려하면서 이를 감시해야 할 우리 정부의 책무도 무거워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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