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자체로 책 전체 내용을 함축하는 문장이 있는가 하면, 단숨에 독자의 마음에 가닿아 책과의 접점을 만드는 문장이 있습니다. 책에서 그런 유의미한 문장을 발췌해 소개합니다. - 편집자주


시 쓰는 일이 아니고서는 좀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허연의 첫 자전적 에세이다. 등단 이래 20여 년 동안 산문집을 출간한 적은 있었지만 대체로 고전 작품에 대한 안내서이거나 고전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해설서 성격의 책이 대부분이었다. 이 책에는 지난 십수 년 동안 신문 칼럼, 잡지, 소셜 네트워크 등 여러 매체들에 쓴 아포리즘과 길고 짧은 산문들을 선별해 수록했다. 그의 삶이 흘러온 내력을 보여 주는 동시에 세상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노력한 또 하나의 내력을 보여 주는 글들이다.

[책 한 모금] ‘나쁜 소년’ 허연의 ‘너에게 시시한 기분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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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에게는 과거를 묻지 않는 미덕이 있다. 자기를 찾아온 모든 것들을 묵묵히 바다로 나를 뿐. 왜 왔는지, 어디서 왔는지 묻지 않는다. 그저 모든 것을 바다로 가져갈 뿐이다. 강물은 칭찬을 들을 때나 비난을 들을 때나 한결같다. 묵묵히 도시를 가로질러 갈 뿐이다.” (37쪽)

“나무들은 서 있는 자리를 바꿀 수 없는 숙명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허락된 정식 간격을 지키기 위해 생장을 포기하는 순교마저도 서슴지 않는다. (중략) 나는 가까이 다가와서 몸을 기대고 속삭이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그보다는 서로의 경계를, 사람 사이의 비무장지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사람들이 좋다.” (38쪽)


“캄캄한 세상을 가르는 밤기차의 불 켜진 창은 하나 하나가 스크린이다. 스크린 안에는 때로는 가슴 아픈 사연이 때로은 기쁜 사연이 들어 있다. 승리한 자가 등장하기도 하고, 실패한 사람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리움의 드라마가 펼쳐지기도 하고, 미움의 드라마가 펼쳐지기도 한다. 밤기차의 불 켜진 창은 생의 스크린이다.” (67쪽)

“아픔의 무게를 논하는 사람은 하수다. 아픔은 오로지 아픈 사람의 것이기에 절대적이다. 다른 사람은 절대로 나 대신 아파할 수가 없다. 각기 다른 사람이 겪는 아픔의 경중을 논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다. 사람들은 누구나 최선을 다해 아프고 있다.” (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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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시시한 기분은 없다 | 허연 지음 | 민음사 | 296쪽 | 1만6000원


서믿음 기자 fait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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