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 독-소 가장 참혹한 전쟁…불가침조약 깬 독일이 먼저 공격
1969년 브란트 서독 총리 동방정책 추진…경제적 이유로 관계 지속
러, 우크라이나 침공 뒤 신뢰 급락…대화 통한 문제해결 믿음 깨져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   [사진 제공= 로이터연합뉴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 [사진 제공= 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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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박병희 기자] 2차 세계대전(1939~1945) 때 독소전쟁(1941~1945)은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으로 기록됐다. 독소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소련인은 2000만명이 훌쩍 넘는다. 전쟁으로 인한 인명 손실 중 역대 최대다. 게다가 독소전쟁은 독일이 러시아의 뒷통수를 치면서 일으킨 전쟁이었다. 독일은 1939년 8월23일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맺고 9일 뒤인 9월1일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독일은 1941년 불가침 조약을 깨고 소련마저 침공했다. 결과적으로 이는 독일의 패전으로 이어졌지만 승전국인 러시아가 입은 인적·물적 피해는 막대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독일과 러시아의 관계가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2차 세계대전 탓에 불구대천의 원수가 됐을 것 같지만 독일은 다른 유럽 국가보다 러시아에서 많은 원유와 천연가스를 수입하면서 경제적으로 긴밀히 협력하고 있다.

러시아에 대한 유럽연합(EU)의 강력한 에너지 제재를 끝까지 반대하는 곳은 다름 아닌 독일이다. 러시아와의 관계 때문에 독일은 러시아 제재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이 때문에 유럽이 대러시아 제재를 가하는 과정에서 독일이 약한 고리라는 비판도 받았다.


◆독일은 어쩌다 ‘약한 고리’가 됐나=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이 러시아와 가까워질 수 있었던 계기는 1960년대 후반부터 이어져온 ‘동방정책’에 뿌리를 두고 있다.

동방정책은 사회민주당(SPD)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서독 총리에 오른 빌리 브란트가 1969년 취임 뒤 채택한 공산권 국가와의 화해 정책을 뜻한다.


독일 과거사 사과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폴란드 바르샤바 유대인 위령탑 앞에서 무릎 꿇은 독일 총리 사진의 주인공이 브란트다. 브란트는 사민당의 정치적 동지인 에곤 바르가 주장한 ‘접근을 통한 변화(Wandel durch Annahrung)’를 기조로 동방정책을 추진했다. 동방정책은 1990년 독일 통일의 밑거름이 됐다. 독일 통일은 독일과 러시아의 관계가 개선될 수 있는 또 다른 계기가 됐다. 많은 독일인들이 소련 공산당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추진한 개방·개혁 정책이 통일의 또 다른 배경이 됐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가 1970년 12월7일 폴란드 바르샤바 유대인 위령탑 앞에서 무릎꿇고 사죄하고 있다.   [사진 제공= 연합뉴스]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가 1970년 12월7일 폴란드 바르샤바 유대인 위령탑 앞에서 무릎꿇고 사죄하고 있다. [사진 제공=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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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유화 정책은 정권을 넘나들며 계속됐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SPD)는 퇴임 직후 러시아 국영 에너지 회사인 가스프롬의 노르트스트림 담당 자문위원장을 맡았고 최근까지 가스프롬 이사로 재직하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에도 직책을 유지하며 비난을 받고 있다.


기독민주당(CDU) 출신의 메르켈 전 총리 역시 친러시아 행보를 이어갔다. 동독 출신 메르켈 총리는 러시아어를 할 줄 알았고 재임 기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메르켈 전 총리는 노르트스트림2 사업을 주도했다. 총 12조원의 건설비가 투입된 노르트스트림2는 러시아 서부 나르바에서 발트해를 거쳐 독일 북부 그라이프스발트까지 직접 연결하는 1225㎞ 길이의 해저 가스관이다. 이 사업이 완공되면 독일은 러시아로부터 천연가스를 저렴하고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다. 하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노르트스트림2는 승인을 받지 못한 채 중단된 상태다.


◆50여년간 이어온 관계= 이처럼 독일이 러시아와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한 이유는 경제적 이유가 큰 것으로 보인다.


독일은 석탄과 철광석은 풍부하지만 석유는 나지 않고, 천연가스는 거의 고갈 상태다. 값싼 러시아의 석유와 천연가스가 독일 경제에 필요했다. 러시아는 석유와 가스 수출로 먹고 산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2021년 러시아 연방예산의 45%가 석유와 천연가스 수입에서 나왔다. 러시아 입장에서 독일은 가까우면서도 놓칠 수 없는 큰 시장이었다.


EU 통계청인 유로스탯에 따르면 독일이 소비하는 가스 중 러시아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2020년 기준 약 65%를 기록했다. EU 전체 평균인 40%보다 월등히 높다. 2010년만 해도 독일이 소비하는 가스 중 러시아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36%에 불과했다. 러시아와 독일을 직접 연결한 가스관 노르트스트림 1이 2011년 개통하면서 러시아산 가스의 비중이 급격히 높아졌다. 독일은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병합했을 때에도 러시아와 가스 거래를 계속 했다.


하지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가 침공하면서 50여년간 이어진 독일의 동방정책 기조가 끝났다는 분석이 나온다.


특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3일 뒤인 지난 2월27일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가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하겠다고 발표한 것은 상징적인 사건으로 여겨진다. 전범국 독일은 오랫동안 무기 수출을 엄격히 통제했기 때문이다. 독일 경제지 한델스블라트의 편집장을 지낸 안드레아스 클루스는 당시 독일의 대응에 관해 쓴 블룸버그 기고에서 푸틴이 독일에서 혁명을 야기했다고 평했다. 클루스 전 편집장은 동방정책에 기반한 대화와 화해가 러시아와의 더 나은 관계를 이끌 것이라는 독일의 오랜 믿음이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을 일깨웠다고 진단했다.

[글로벌 포커스] 가깝고도 먼 독일-러시아, 반전의 역사 원본보기 아이콘


◆에너지 거래 중단… 獨·러에 타격= 독일이 2차 세계대전 때 독소 불가침 조약을 깨면서 러시아를 배신했다면 이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독일의 믿음을 깼다는 측면에서 러시아의 독일에 대한 배신으로 해석할 수 있다.


독일 경제에서 러시아 에너지가 차지하는 비중만큼 독일이 당한 배신의 대가는 클 것으로 보인다. EU가 러시아로부터의 에너지 독립을 천명한 만큼 당장 독일은 러시아 가스·석유 수입 비중을 크게 줄여야 하며 장기적으로 아예 거래 자체를 끊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독일 부총리 겸 경제·기후 장관인 로베르트 하벡은 지난 6일 연정에 새 에너지 정책을 제안했다. 하벡 부총리는 독일의 재생 에너지 비율을 2030년까지 80%, 2035년까지 거의 100%까지 높이자고 제안했다.


러시아도 독일을 비롯한 유럽 시장을 잃으면 상당한 경제적 타격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지난해 10월까지 러시아 원유 수출 물량의 49%가 유럽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로 수출됐다. 천연가스의 경우 수출 물량 중 4분의 3이 유럽으로 향했다.


향후 중국이 유럽의 대안으로 떠오를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하지만 현재 중국의 연간 가스 소비량은 3310억㎥로 유럽의 5410억㎥에 미치지 못한다. 중국의 가스 소비량은 2030년이나 돼야 5260억㎥로 현재 유럽의 소비 수준에 근접할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과 러시아는 2014년 두 나라를 잇는 첫 가스관 ‘파워 오브 시베리아(Power of Siberia)’ 건설을 시작했다. 2019년부터 일부 구간이 개통됐으며 2025년 파워 오브 시베리아 완전 개통이 이뤄지면 러시아는 연간 380억㎥의 가스를 중국으로 수출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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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의 제재 조치로 러시아는 원유 생산에 필요한 장비와 기술을 구매하기 어려워졌다. 미국 워싱턴 소재 컨설팅업체 라피단 에너지의 페르난도 페레이라 애널리스트는 "러시아가 서방의 기술을 이용할 수 없다면 원유 생산량을 유지하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가스의 경우 러시아의 액화천연가스(LNG) 생산능력이 다른 국가들에 크게 뒤처져 있어 결국 가스관을 이용한 수출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다는 점도 러시아의 고민거리다.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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