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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독서]'에로틱 세계사', 치정에서 산업으로 바뀐 '性스런 역사'

최종수정 2019.03.22 16:01 기사입력 2019.03.22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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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저널리스트 모임 난젠&피카드의 '섹스史 교과서'
1만년간 자유분방했던 '性'의 근대화와 산업화 과정 전반을 다뤄
내재된 오리엔탈리즘의 불편함... 가십성 위주로 편집된 동양의 성문화


[기자의 독서]'에로틱 세계사', 치정에서 산업으로 바뀐 '性스런 역사'


[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 보통 섹스(Sex)를 주제로 한 역사책들은 공간적ㆍ시간적 한계를 두고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수한 시대에 특수한 지역에서 벌어졌던 특이한 성(性)문화를 다큐멘터리의 카메라 앵글처럼 비추면서 다루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에로틱세계사'는 석기시대부터 현대시대까지 열 개로 1만 년 인류사를 쪼개놓고, 각각의 에피소드를 통해 방대한 섹스사를 써내려간다. 마치 세계사 교과서를 보는 듯한 구조로 구성돼있다.


방대한 분량의 섹스사 교과서가 탄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책을 쓴 저자가 한 명이 아니라 단체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난젠&피카드(Nansen&Piccard)'라는 독일 뮌헨에서 활동하는 저널리스트 모임에서 기자들이 썼던 에피소드들을 모아 출간한 책이다. 100여개의 에피소드들은 모두 개당 원고지 10매를 넘어서지 않는 기사 형태로 쓰여 있다. 348쪽에 이르는 적지 않은 분량이지만, 한번 손을 대기 시작하면 술술 읽히는 이유는 이런 독특한 구성에 있다.

하지만 그저 말랑말랑한 제목과 부제들만 보고 달려들기에는 진입장벽이 꽤 높은 책이다. 이 책은 결코 독자들에게 상냥하지 않다. 저자들이 생각한 독자층은 세계사에 무척 관심이 많거나 적어도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프랑스대혁명의 분절점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문헌 최초 '딜도'를 사용한 성직자"란 챕터는 매우 흥미롭지만, 막상 이 챕터의 주인공인 독일 보름스(Worms) 대성당을 지은 부르하르트 주교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기 때문에 일일이 찾아보지 않는다면 수박 겉핥기로 넘어가기 십상이다.


문헌 최초로 '딜도(dildo)'라는 단어를 썼다고 알려진 서기 11세기초 독일 보름스(Worms)의 부르하르트 주교를 묘사한 '에로틱 세계사' 내 삽화

문헌 최초로 '딜도(dildo)'라는 단어를 썼다고 알려진 서기 11세기초 독일 보름스(Worms)의 부르하르트 주교를 묘사한 '에로틱 세계사' 내 삽화



이 마냥 친절하지만은 않은 에로틱의 1만 년사를 저자들과 함께 추적해 나가다보면, 현대인들이 정말로 섹스의 자유를 얻은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생기게 된다. 책의 초반은 신화, 성경, 판타지 이야기로 출발하며 동성애든 원조교제든 자유분방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국가의 풍요를 기원하며 사제들과 함께 다산기원을 위해 매년 축제일마다 광란의 섹스파티를 벌였던 에트루리아인들의 이야기, 매년 아름다운 귀족소년들을 보쌈해 일평생 자신의 성적, 정치적 파트너로 삼았던 스파르타의 장군들 이야기는 거침없다. 심지어 기독교에서 성욕 자체를 죄악으로 규정해 지배하던 서구의 중세시대조차 천사가 나타나 저 여자를 임신시키라는 신의 계시 하나만 명분으로 대면 그 누구와도 섹스를 할 수 있는 자유분방함이 살아있다.


성욕을 죄악시하던 교회와는 별개로 또 현실세계의 절대 권력자로서 자신의 성기능을 과시해야했던 중세시대 왕들의 고충 또한 아이러니하다. 왕비를 여섯 번 갈아치우고 이중 두 명을 자기 손으로 사형시킨 영국왕 헨리8세의 경우, 일부러 성기를 커보이게 하려고 바지 속에 짚단을 넣고 다녔다고 한다. 이는 병약한 아들을 한 명밖에 얻지 못해 남성성에 치명타를 입은 헨리8세의 고민이 담겨있다. 왕의 성적기능은 그의 정력과 권력을 그대로 비춰주는 거울처럼 여겨지고, 이것이 약화되는 것은 그의 지배력의 약화와도 연결된다. 백제 의자왕의 '삼천궁녀'나 중동 술탄들의 '하렘' 역시 이러한 권력과시를 위한 도구로 만들어졌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시대가 산업혁명기 이후로 넘어오면서 이런 판타지는 산산이 깨진다. 위로는 국왕부터 아래로는 백성들까지 더 이상 이런 성적 판타지는 조금도 허용되지 않는다. 사유재산제도상 상속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간통은 천륜을 어기는 죄악으로 업그레이드 됐다. 중세시대까지만 해도 전우애를 돈독히 하기 위해 권장됐던 동성애와 항문성교는 이제 법적 처벌의 대상이 됐다. 이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성병이 100만 명 이상의 거대 상비군을 유지해야 하는 근대 군사국가 입장에서 치명적인 질병으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영웅은 더 이상 호색해선 안 되는 시대가 됐다.


자신의 음경 크기가 커보이게 하기 위해 바지 속에 짚단을 넣고 다녔다 알려진 헨리8세의 초상화(사진=위키피디아)

자신의 음경 크기가 커보이게 하기 위해 바지 속에 짚단을 넣고 다녔다 알려진 헨리8세의 초상화(사진=위키피디아)



자유분방한 섹스에 대한 제재가 심해지면서 두 남녀의 은밀하고 아름다운 치정은 이제 고도로 정제된 산업으로 발전해나간다. 콘돔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타이어를 발명한 찰스 굿이어의 이야기부터 사회 불만을 억제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동구권의 성인잡지들, 온라인에서 판매되는 성인용품들과 조건만남을 이어주는 애플리케이션들에 이르기까지 섹스의 근대화ㆍ산업화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단순히 여성의 벗은 몸을 어떻게 노출할 지에 집중돼있던 포르노 산업은 이제 각 개인의 취향에 맞춰 다품종 소매체제로 전환됐다. 여성화 로봇을 통한 인공지능(AI)의 등장도 코앞으로 다가온 현실이다.


이처럼 흥미로운 내용이 많지만, 한편으로 책 속에 내재된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라는 독도 들어있다. 간간이 챕터마다 하나 둘씩 등장하는 동양, 중동 국가들의 성문화를 소개하는 내용에서 걸러지지 않은 오리엔탈리즘이 그대로 드러난다. 중국 황실의 동성애 문화나 일본의 본디지 문화, 이집트와 인도의 성문화를 다루는 내용들은 무게감 없이 가십성 주제들 위주로 편집돼있다. 에로틱 세계사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지나치게 유럽과 미주지역에 집중된 내용 또한 불편한 점이다. 현대 부분으로 넘어오면서부터는 서구권 외의 이야기는 아예 등장하지도 않는다.


오리엔탈리즘을 넘어 아주 불편한 내용들도 존재한다. 산업화 이전의 성적자유를 만끽하고 싶은 백인들이 서구열강이 식민지로 삼은 아시아, 아프리카 등지로 떠난 이야기들이다. 서구 실정법이 닿지 않는 그곳에서 백인들이 현지인들에게 자행했던 각종 성범죄들은 마치 유쾌한 모험처럼 다뤄진다. 프랑스, 벨기에, 독일 등 서구 국가들이 여전히 과거 19세기 식민지에서 자행됐던 잔혹한 학살과 성범죄에 대해 일절 함구하고 있는 상황이 반영돼 보인다. 이들 국가의 이런 몰염치한 행태는 일본의 반성 없는 역사인식에 크게 한몫하고 있다. 이러한 점들이 이 책을 마냥 에로틱하고 가볍게 볼 수 없게 만드는 독소들이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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