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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온유의 느·낌·표] 내 안의 역사:현대 한국인의 몸과 마음을 만든 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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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람의 일상도 인류 진화의 결과물

내 안의 역사
전우용 지음
푸른역사

내 안의 역사 전우용 지음 푸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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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가방'은 일본어 '카방(かばん)'에서 왔고, 카방은 네덜란드어 '카바스(kabas)'에 기원이 있다. 한국어 '구두'는 일본어 '쿠쯔(くつ)'에서 나왔고, 쿠쯔는 영어 '굿즈(goods)'에서 유래했다. 최초의 번역은 늘 괴로운 법인데, 19세기에야 유럽ㆍ미국과 접촉한 조선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일본인과 중국인들이 대응시킨 단어를 그저 가져다 썼기 때문이다.


1980년대 초중반까지 1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한국인들은 별 문제의식 없이 이 편리함을 누렸다. 그러나 이 편리함은 한국인의 세계를 확장시킬 가능성도 빼앗아갔다. 사람은 단어로 세계를 인지하며 의식 속에서 재창조한다. 세계를 구성하는 개념과 물질의 종류는 단어의 수를 넘어서지 못하는데, 단어를 가져다 쓴 탓에 물질세계가 늘어났음에도 정신세계가 풍요로워지지 못한 것이다.

새책 '내안의 역사'는 현대 한국인의 몸과 마음을 만든 근대에 대한 이야기다. 저자는 케케묵은 사료더미나 뒤지는 '책상물림 역사학자'가 되길 거부하는 전우용이다. 그는 책을 통해 보통사람에게 보통사람의 역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데, 이를 통해 우리가 욕망하고 판단하고 실천하는 모든 것의 기원과 변화 방향을 알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저자는 '역사는 승리한 자의 기록'이라는 말을 거부한다. 신성권력이 지배하던 시대에는 신과 신의 아들=영웅의 이야기가 역사였다. 세속권력이 지배하던 시대에는 왕과 그 신하들의 이야기가 역사였다. 하지만 민주주의 시대의 역사는 다르다는 것이다.


저자는 "인류 역사의 본류는 사람의 시선을 끌지 않는 평범성"이라며 "보통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이야말로, 수백만 년에 걸친 인류 진화의 결과물"이라고 말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서민, 보통사람, 민중이 역사가 되는 시간이 온 것이다.

책은 근대 한국인의 언어는 물론 개인, 가족과 의식주, 직업과 경제생활, 공간과 정치, 가치관과 문화 등을 대주제로 갖가지 이야기를 담았다. 읽으면 읽을수록 '과거를 착각했다'는 생각이 들게하는 여러 대목이 등장하는데 그 중 하나가 '현모양처론'이다. 중세 유교의 덕목쯤으로 여겨지며 많은 여성을 옥죈 현모양처론은 사실 알고보면 메이지 시대 일본에서 창안된 천황제 국민국가의 여성관이었다. 남성이 나라에만 충성할 수 있도록 뒤에서 가정을 맡아 꾸리며 자식을 충성스러운 신민으로 키우는 것. 그것이 현모양처론의 실체였다. 실체를 알았더라면 그토록 '현모양처'를 강조하는 시어머니 탓에 괴로워한 며느리가 조금은 줄지 않았을까.


또 하나는 장보기다. 1990년대만 해도 남자가 시장에서 콩나물 값을 흥정하면 '체면 구긴다'고 흉 본 이들이 많았을 테다. 하지만 조선시대 장은 '남성들의 공간'이었다고 한다. 여성들이 모르는 남정네들과 말을 섞는 것이 남 입에 오르내릴 만큼 수치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장보기의 주도자가 남성에서 여성으로 넘어가게 된 계기는 개항이다. 개항 이후 전차, 기차, 극장 등의 등장으로 '남녀칠세부동석'을 지키기 어렵게 되자 장이 오히려 여성들만의 공간으로 바뀌어갔다. 시장에서 생선이나 콩나물을 팔아 자식 대학 보낸 어머니의 역사는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셈이다.


책에는 조금 애석한 이야기도 등장했는데 바로 한국 남성들이 통과의례처럼 겪는 포경수술에 대한 것이다. 책에 따르면 포경수술의 일반화는 한국전쟁 당시 성병 예방과 미 군의관의 수련 필요성이 겹친 결과였다. 단 1~2주 동안이라도 장병들의 성 접촉을 차단하면서도 의료진에게 풍부한 수술 기회를 줄 수 있는 절묘한 방법으로 포경수술이 지목된 것. 그 덕에 당시 조수 노릇밖에 못하던 비뇨기과 의사들이 수술실의 주역이 됐다는 후문이다.


이처럼 우리 곁의 모든 것에는 뿌리가 있고, 우리가 겪는 모든 현상에는 까닭이 있었다. 저자는 "보통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은 수백만 년에 걸친 인류 진화의 결과물이며, 인간의 철학ㆍ사상ㆍ가치관뿐 아니라 개별 인간의 몸도 역사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라고 말했다.


임온유 기자 i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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