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의 상상 세계를 극적으로 확대한 그를 '과학 소설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베른과 어깨를 겨룰 만한 작가는 휴고 건즈백(Hugo Gernsback), 허버트 조지 웰스(Herbert George Wells) 정도다. 건즈백은 '랄프 124 C41 플러스-2660년의 로맨스'(1912)에서 형광등ㆍ플라스틱ㆍ레이더ㆍ테이프 레코더ㆍ텔레비전 등을 예언했다. 그의 이름을 딴 휴고상은 과학소설 최고의 상으로 꼽힌다. 웰스는 '타임머신'(1895), '투명인간'(1897), '우주전쟁'(1898) 등을 썼다.
80일간의 세계일주는 영국 신사 필리어스 포그가 클럽 친구들과 2만 파운드 내기를 걸고 프랑스인 하인 파스파르투와 함께 80일 만에 세계를 일주한다는 내용이다. 모험을 즐기며 꼼꼼하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포그는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내기에서 이긴다. 시한보다 하루 늦었지만 지구 반대편의 시차로 인한 착오였음이 밝혀져 아슬아슬하게 클럽에 도착하는 장면이 마지막 하이라이트다. 1936년에 프랑스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장 콕토(Jean Cocteau)와 그의 친구 마르셀 킬(Marcel Khill)은 베른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80일간 세계 일주를 한 다음 그 기록을 책(다시 떠난 80일간의 세계일주ㆍMon premier voyage:Le tour du monde en 80 jours)으로 남겼다.
미스터 포그의 여행은 어디까지나 베른의 머릿속을 종횡한 모험이다. 콕토는 현실의 세계를 누볐다. 베른의 상상과 콕토의 체험 사이를 한 여성의 기적 같은 도전이 가로지른다. 1890년 오늘, 미국 기자 넬리 블라이(Nellie Bly)가 세계일주를 마치고 뉴욕으로 돌아갔다. 스물다섯 살 처녀는 4만5000㎞에 이르는 여행을 72일 6시간 11분 14초에 마쳤다. 1889년 11월 14일에 뉴욕을 떠나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의 수에즈 운하를 거쳐 스리랑카의 콜롬보, 홍콩, 페낭 반도, 일본을 거쳐 다음 해 1월 25일에 돌아갔다. 소속사는 여행 기획을 남성 기자에게 맡기려 했지만 어림없었다. 넬리는 으름장을 놓았다.
넬리는 보통 여성이 아니었다. 그는 1885년 '피츠버그 디스패치'에 실린 '여자아이가 무슨 쓸모가 있나'(What Girls Are Good For)라는 칼럼을 읽고 격분해 '외로운 고아소녀'라는 가명으로 반박문을 보냈다. 그의 원래 이름은 엘리자베스 코크레인(Elizabeth Jane Cochran)인데, 이 일을 계기로 같은 신문의 기자가 되었다. 넬리의 활약은 눈부셨다. 특히 1887년 뉴욕 블랙웰스섬 정신병원에 잠입해 정신병원의 끔찍한 환경과 환자 학대를 고발한 기사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보도를 계기로 미국 정부는 병원의 상황을 개선하고 의료 시스템을 개선했다. 이 업적은 넬리에게 탐사보도의 창시자라는 명예를 안겼다.
넬리 블라이는 1895년 사업가인 로버트 시먼과 결혼했다. 그녀의 나이 서른하나, 시먼은 일흔세 살이었다. 남편의 건강이 나빠지자 언론계에서 은퇴해 남편의 일을 넘겨받았다. 시먼은 1904년에 숨을 거두었다. 넬리는 세계1차대전이 터지자 전선으로 달려가 유일한 여성 종군기자로 활약했다. 쉰다섯 살에 미국에 돌아가 칼럼을 쓰고 고아들을 돌보다 1922년 1월 27일 뉴욕의 성 마르코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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