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마흔을 넘기던 시절, 가벼운 우울감에 시달렸다. 인생의 절반쯤 온 걸까. 살아온 시간을 되돌아보고, 살 날을 상상했다. 자꾸 늙어가는 듯한 모습이 처량해만 보였다. '어릴 적 나이 마흔 어른을 보면 크게만 보였는데, 난 뭐지.' 그때 눈에 들어온 글귀가 '인생의 가장 젊은 날은 바로 오늘이다'다. 몇 번을 머릿속에 간직하려고 했지만 이 몇 글자조차 며칠이 지나면 어김없이 잊혀졌다. 기억하자. 그렇게 내 휴대폰의 머릿글로 남겨졌다.
지난 주말 끝난 드라마 '도깨비'에서 도깨비신부 지은탁(김고은 분)은 도깨비 김신(공유 분)이 불멸의 삶을 끝내게 되자, 그와의 만남을 망각하기 전 수첩에 적는다. '기억해. 기억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김신이야. 기억해. 기억해'라고. 하지만 기억은 지워진다. 본인의 글씨로 남겨진 이 글이 어떻게 쓰여졌는지조차 떠올리지 못한다. 찬란했던 사랑의 추억은 암흑으로 덧씌여진다.
기억(記憶ㆍmemory). 두산백과사전은 '사람이나 동물 등의 생활체가 경험한 것이 어떤 형태로 간직됐다가 나중에 재생 또는 재구성돼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정의한다. 신체적 습관ㆍ컴퓨터 등 기계적 기억도 넓은 의미에서의 기억에 포함된다.
개의 기억하는 능력은 꽤 뛰어나다. 먼 곳에 버려진 개가 스스로 길을 찾아 집으로 돌아온 이야기는 동ㆍ서양을 막론하고 숱하다. 먹이를 챙겨주는 주인을 따르고, 괴롭히는 사람을 알아본다. 반복적으로 종소리를 들려준 뒤 먹이를 주면, 나중에는 종소리만 들어도 침을 흘린다는 '파블로프의 개'는 유명하다. 짧은 스토리와 감정을 함께 떠올리는 일화적 기억도 갖고 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속담까지 있다.
사람은 기억력을 키우기 위해 평생동안 끊임없이 노력한다. '뒷통수가 납작하면 머리가 나쁘다'는 속설 때문에 아기의 머리를 옆으로 누인다. 기억력을 높이는 데 좋다는 각종 음식, 놀이법이 끊이지 않는다. 뱃속에 있을 때부터 진행되는 엄마들의 노력은 가상하지만, 얼마나 효과가 있을 지에는 갸우뚱해진다. 늙어서는 치매 예방을 위해 화투장이라도 돌린다. 인간은 '망각의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
데이비드 발다치는 소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에서 과잉기억증후군(hyperthymesia)을 가진 주인공 에이머스 데커를 등장시킨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을 기억한다. 형사인 데커에게는 진급시험쯤은 어렵지 않다. 범인 검거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다. 그러나 가족이 살해된 장면을 목격한 뒤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에게는 '기억의 저주'다. 도깨비가 '불멸의 저주'에 걸린 것처럼.
우리 곁에는 비슷한 고통을 안고 사는 이들이 있다. 세월호 참사. 벌써 1000일 넘게 잊지 못해, 잊혀지지 않아, 잊어서는 안돼 고통스러운 사람들. '도깨비'에서 저승사자(이동욱 분)가 망자에게 건넨 '망각의 차'가 있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냥 기억에서 지운다고 잊혀지는 건 아닐테니까. 머지 않아 그 잔인했던 봄을 다시 맞아야 한다. 그 고통을 기억하는 일, 남은 이들의 몫이다.
조영주 기자 yjch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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