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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대우의 경제레터]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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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중이던 어느 날. 런던에 도착해 공항을 빠져 나오고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횡단보도 옆의 붉은 신호등 하나가 깜빡이는 것을 보게 됐습니다. 그때 머리를 스쳐가는 단상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살아온 인생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래서 욕심을 버리고 천천히 살기로 했습니다.

사진작가로 변신한 윤현수씨(한국상호저축은행 회장). 그는 이때부터 사진 찍는데 몰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순간을 포착하며 자신의 인생을 새롭게 투영하는 작업에 열정을 쏟기로 한 것입니다. 재빠르게 먼저 가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그는 이제 사진을 통해 욕망이나 욕심을 잠재우고 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습니다.
작년 5월 그를 만났을 때였습니다. 빛과 어둠의 세계에서, 싸움소의 생애에서 자신의 모습을 투영해 내고, 이를 작품으로 승화시킨 뒤였습니다. “다음 작품이 뭐냐”는 질문에 그의 대답은 ‘곤지곤지 잼잼’이었습니다. 익살스러운 작품을 준비하는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1년이 지났습니다. 저의 예상은 빗나갔습니다. 곤지곤지 잼잼을 통해 인간의 본질, 인간의 존엄성, 자연의 섭리,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사진세계를 다른 세계로 가는 문으로 연결시키고 있었습니다.

그의 작품세계는 이번 주말 시작되는 사진전시회, 이와 병행해 직접 집필한 ‘사진의 비밀’에 투영돼 있습니다. 그의 말을 들어봅니다.


“두 손을 움켜잡고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났다. 탯줄이 잘려 나가는 순간 쏟아지던 세상의 빛이 그토록 두려웠는지 심하게도 울었다. 그런 내 마음을 달래주고 울음을 멈추게 한 것으로 어머니의 젖줄과 어머니가 내게 가르쳐 준 그 놀이였다.

주문 같기도 하고 자장가 같기도 한 동작과 소리들, 쥔 주먹을 폈다 다시 쥐고, 또 펴고 쥐며, 손가락으로 손을 콕콕 찍는다. 좌우로 머리를 흔들며 손뼉 친다.

‘곤지곤지 잼잼, 도리도리 짝짜꿍’

그렇게 어머니와 웃고 놀면서 비로소 세상의 두려움을 잊어갔다. 내가 무의식적으로 어머니에게서 배운 그 몸집과 소리는 지금보니 ‘檀童十訓(단동십훈)’이다. 누가 언제 만들었는지 구체적 기록은 없지만 단군 이래로 왕족 자녀들에게 세상 사는 이치를 가르치는 열 가지 교훈이다.

이는 이 땅의 어머니들이 아이와 처음으로 소통하는 몸짓이며 내가 태어난 후 최초로 배운 놀이였다. 또한 어머니가 대대로 물려받은 수수께끼였다.”



“30여년도 지난 일이다. 대학 입시에 두 번이나 낙방하고 당시 후기 대학에 입학한 후 나는 상당기간 삶의 수수께끼에 빠져 있었다.

고교 때 수재로 불리던 한 친구도 대학 진학에 실패해 자살한 직후라 그랬을까? ‘왜 사는가’라는 의문은 내겐 꼭 풀어야할 과제였다. 수학을 좋아했던 나는 수로써 사람 사는 이유를 규명해 보고자 했고 나름대로 정립한 내용을 나는 ‘0’의 철학이라 불렀다.

결국 무한한 숫자중 0이란 수의 의미가 바로 사람 사는 이유였다. 그렇게 대학시절 나는 생성측면에서 양과 음의 일치는 사랑으로, 정수 자체의 완전한 소멸의 의미는 죽음이라 단정했다.

세상은 5개의 차원 또는 그이상의 차원이 병존하고 있다. 나는 사랑과 죽음을 0차원이라고 본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크기와 질량이 없다. 3차원의 패러다임이나 셈법과는 완전히 다를 것이다. 0차원은 부정과 불능으로 계산되지 않는 무한 셈법의 세계다.”



“뒤늦게 새롭게 배우고 빠진 놀이가 사진이다. 사진을 배우던 초기에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내 자신을 투영한 피사체를 찾아 찍고 또 찍었다. 카메라 두 대로 하루 종일 사진을 찍었다. 어느 순간 빛의 그림으로 알았던 사진에서 나는 사진이 던지고 있는 무서운 비밀의 수수께끼를 보았다.

사진이 발명되기 오래전, 이미 이 땅에는 사진이란 단어가 있었다. 달마대사는 사진을 ‘마음을 구하는 것(求心)’이라 했다.

무릇 사진이란 외형을 똑같이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정신과 그 마음을 담는 것이다. 사진은 마음이며, 무상의 변화이며, 죽음의 시간에 대한 경종이다. 이승에서는 날아가는 화살이며 저승에서는 영원히 정지될 불멸의 화살이다.”



“사진은 우리의 죽음을 알리고 있다. 빛바랜 사진들…온실사진, 웨스턴의 누드사진, 스티글리츠의 구름 사진…. 이들은 인프레임에서 당시 살아 존재했던 것들이 지금은 모두 죽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 뿐만아니라 당시 아웃프레임에서 존재했던 촬영자나 산 것들도 이제 더 이상은 이곳에 현존하지 않는다는 부재를 보여주고 있다. 사진은 죽음의 그림자로 산 자에 붙어있다.”



“저는 오늘 제 손금을 찍어 봅니다. 어머니가 주신 이 몸에 무슨 수수께끼가 그리 많은지, 무엇을 암시하는 기호들이 이리 서려 있는지, 이리저리 카메라를 대어 봅니다. 어머니가 가르쳐준 어릴 적 그 놀이의 비밀을 찾아 밤새도록 셔터를 눌러 봅니다.

저를 품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도 보이고, 온갖 인연들로 얽히고설킨 마음의 연기도 보입니다. 사는 것이 힘들고 두렵습니다. 제가 태어나던 날처럼 두 주먹을 힘껏 움켜쥐어 보지만 삶의 무게는 더해만 갑니다.

한바탕 이 무상한 꿈이 끝나면 저도 어머니가 계신 그 미지의 세계로 가겠지요.

곤지곤지 잼잼

곤지곤지 잼잼

돌아가진 어머니가 나를 다독인다.”



얼마 전 록펠러 5세(스티븐 록펠러 주니어회장)를 만났을 때였습니다. 그는 골프 마니아였습니다. 지인들과 내기 게임을 할 때는 습관적으로 할머니와 어머니를 떠올린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신에 가장 많은 사랑을 쏟아부어주던 할머니와 어머니를 생각하면 게임이 잘 풀린다는 이유였습니다.

사진작가 윤현수씨. 최근 몇 차례 저는 그를 만나면서 그가 만들어내는 에너지가 어디서 용솟음치는지 궁금했습니다.

답은 어머니였습니다. 사업에 대한 열정도 그랬고, 사진에 대한 열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가 이룩한 사업성공의 비밀도 거기에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곤지곤지 잼잼을 떠올렸고 수없이 어머니가 주신 손금을 찍어봤습니다. 어머니가 가르쳐준 어릴 적 그 놀이의 비밀을 찾아 밤이 새도록 셔터를 눌러보기도 했습니다.

4월28일부터 5월3일까지 전시되는 그의 사진전(종로구 관훈동 인사아트센터 본전시장)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 봅니다. 모든 에너지의 근원이 거기에서 표출된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저를 품고 있던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는 순간 삶의 무게는 더 가벼워지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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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대우 아시아경제신문 회장 presid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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