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막바지에 최후의 발악을 하는 하늘. 그야말로 엄동설한의 맹위 한 가운데를 통과하고 있습니다. 폭설이 내리는 엊그제 그 시간에 청계산을 올랐습니다. 생애 한 번 밖에 보지 못할 100년만의 그 설경을 가슴에 담으려는 듯 드문드문 등산객들이 보였죠.
앞서 찍힌 발자국이 없었다면 결코 가늠할 수 없는 아이스크림 눈길을 걸으며, 어지러이 앞을 가리는 하얀 눈의 유희가 코끝에서 소멸되는 것을 내내 느낀 두 시간여. 백설이 난분분하는 저 청렴한 산속에서 세기의 증인이 되고 싶었을 따름입니다.
그렇게 산에 올라서 할 일을 깨닫거나 살 길을 찾은 사람들의 얘기가 떠올랐습니다. 이른바 썩지 않는 ‘기적의 사과’를 수확한 일본 아오모리현의 과수원 주인 기무라 아키노리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한 우물만 10년을 파면 끝이 보인다’는 말을 온몸으로 보여준 농부입니다.
평생을 사과농사밖에 몰랐는데, 그의 아내가 농약 알레르기에 몸이 상한 걸 보며 농약 없이 사과나무를 키우기로 마음먹었다죠. 하지만 해마다 농약에 의지했던 나무가 자력으로 병충해를 극복하고 꽃을 피우기엔 이미 농약 내성에 길들여져 있었겠지요.
봄이면 인근 과수원에서 마실 나온 온갖 벌레들까지 합세해 그의 과수원은 폐농직전의 상태로 전락해 갑니다. 그때까지는 농약을 뿌리지 않았을 뿐, 열심히 풀을 뽑고 사과나무를 돌본 건 과거와 다름이 없었으나 시장에 내다팔 사과는 수확하지 못합니다.
들끓는 벌레를 일일이 잡을 힘도 잃고 주변에선 수입도 없이 고집부리는 정신나간 노인으로 취급받았지만, 자신이 키운 사과나무에 대한 애정과 믿음 한 가지는 버리지 않았습니다. 꽃도 피지 않고 벌 나비도 찾지 않는 과수원을 오간 지 몇 년. 지쳐서 자살하려고 오른 마을 뒷산에 누워서 드디어 경이로운 자각을 하게 됩니다.
갖가지 크고 작은 나무들과 무성한 잡초들이 함께 의지하며 제초제 없이도 살아가는 ‘숲속의 공존’을 목격하고 그대로 사과밭에서 실천해보자고 맘먹었습니다. 위대한 교육자 J.J 루소가 경고했던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해법이 교실을 벗어나 사과재배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방치한 지 10년이 흐른 즈음.
사과를 탐했던 농부가 사과나무를 다시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더 이상 나무주변에서 얼쩡거리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미안하다. 사과나무야 그동안 농약을 마구 뿌려서···”라는 기무라 노인의 진심어린 사과가 사과나무를 감동시켰을까요?
마침내 수백그루 가운데 사과 꽃 7개가 피었고, 그중에서 두 개의 사과가 홍조를 띠고 수줍게 영글어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농부는 그 사과를 희망을 암시하는 하트 사인으로 확신하고 1년만 더 기다려보기로 작정합니다.
그렇게 열린 기무라의 사과가 상온(常溫)에서 해를 넘겨도 썩지 않는다는 사실이 한 요리사에 의해 발견돼 TV에 방영되었고, ‘기적의 사과’란 이름으로 일본열도를 흥분시켰습니다. 과실이 오래되면 문드러지고 썩는다는 기존의 상식을 뒤엎은 한 알의 사과!
농부들은 그동안 왜 농약을 뿌려가며 결국은 썩어갈 열매를 재배해왔던가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제 기무라 노인의 사과들은 수확되기 전에 비싼 값을 받고 다 갈 곳이 정해지고, 그가 겨울이면 하는 일은 마른 사과나무를 두 손으로 감싸고 ‘내년에 다시보자 너만 믿는다’는 무한신뢰의 한마디 뿐이라고 합니다.
일본의 과수원으로 견학을 간 많은 한국농부들이 놀고먹는(?) 기무라 노인을 보고 무슨 교훈과 암시를 얻어올까 걱정도 됩니다. 비결은 풍성한 사과밭에 있는 게 아니라 저 멀리 떨어진 숲속의 자유방임에 있는데 말입니다.
새해 들어서 유독 강조되고 있는 소위 ‘녹색성장’ 구호의 난무를 보며, 대자연의 위대한 순환시스템이 자연 상태로 복원되기까지 우리 인간들이 새로이 ‘무언가 일을 벌이지 않는 것’의 평범한 순리를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깊이, 그리고 새삼스럽게···.
시사평론가 김대우(pdik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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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S. 저는 더 이상 수요레터를 쓰지 않지만, 지난 1년간을 그랬던 것처럼 항상 관심을 갖고 읽겠습니다. 호랑이 등을 믿고 백호가 달리는 대로 또 다른 길을 떠납니다. 진정 고마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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