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태 시인의 나주, 왕건과 버들아씨의 로망스가 숨쉬는 곳<3·4>
‘나주곰탕’ 한 그릇 비우고
$pos="C";$title="";$txt="모 그룹총수가 나주에 오면 늘 들러서 식사를 했다는 나주곰탕 노안집(원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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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 이쯤에서 좀 쉬었다가 돌면 어떨까.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도 있고 그 흔한 ‘맛기행’이라는 말도 있지 않는가. 나주로 여행을 왔다는 사람이 ‘나주곰탕’이 아닌 다른 음식을 먹고 간다면 그건 제대로 여행을 한 것은 아니지. 뒤따라오는 일행을 향하여 껄껄껄 웃으면서 나주곰탕에 대하여 선전전을 펼친다.
뒤따라오는 일행을 향하여 껄껄껄 웃으면서 나주곰탕에 대하여 선전전을 펼친다
20년을 훌쩍 넘어서는 그해였지. 당시 광주의 J신문사 문화부장으로 재직하던 나는 시리즈로 ‘국토문화기행’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이곳에 와서 나주곰탕을 예찬(?)하는 글을 썼지 않았던가. 어쨌든 음식문화는 그 나라의 모든 문화 중에서 가장 독특한 이미지를 심어준다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다른 것은 잊어도 음식이 주는 맛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은 내가 중앙아시아 여행 중에 들은 얘기 한 토막이다. 나주곰탕을 즐겁게 먹는 일행에게도 나는 이 얘기를 들려준다.
(혹시 사마르칸트를 아십니까? 중앙아시아에 위치한 우즈베기스탄이라는 나라가 있지요. 사마르칸트는 바로 그 나라의 옛날 수도인데 그 유명한 티무르대제가 세운 도시로 당시 왕국의 수도였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도시에서 만든 유명한 빵이 있거든요. 우리네 한국 사람들이 발음하기가 여간 힘든 ‘뽀르쉬키 빵’이 그것입니다.
$pos="C";$title="";$txt="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런 나주곰탕, 한 그릇 비우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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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름이 20센티미터의 크기인 이 둥근 빵을 다른 지역에 가서 사 먹으면 맛이 그 맛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티무르대제를 아시겠지요? 티무르제국을 만든 절룩발이 그 정복자 말입니다. 그는 칭기즈칸 이후 중앙아시아 전역을 휩쓴 유목민정복자로 유명한데 인도에서 러시아를 거쳐 지중해까지 정복한 사람이지요. 그는 사마르칸트의 ‘뽀르쉬키 빵’을 잊지 못해 먼 전쟁터에서도 안달을 했다는 애기가 있습니다. 물론 이 빵은 우즈베기스탄의 일반 국민들이 단 하루도 멀리하지 않는 주식입니다.
종종 이곳 나주시장통에까지 내려오셔서 나주곰탕을 들곤 했답니다
티무르대제는 수도를 타슈겐트로 옮기는 과정에서도 ‘뽀르쉬키 빵’ 맛을 잊지 못하여 고향 사마르칸트에서 직접 빵제조업자를 데려오게 했습니다. 뿐이겠어요. 그는 사마르칸트에서―아, 타슈겐트와 사마르칸트의 거리는 오늘의 고속열차로도 4시간 30분이 족히 소요됩니다―직접 물을 가져오게 하고, 사마르칸트에서 직접 빵틀과 빵 제조기를 가져와 빵을 만들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그도 고향에서 만든 빵과 똑같은 빵맛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티무르대제는 지금 자식들과 함께 사마르칸트에 잠들어있습니다.)
나주국밥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그러니까 금호그룹회장 박인천 씨가 있잖습니까. 물론 지금은 옛사람이 된 사람인데 그분의 고향이 이곳 나주였지요. 그분께서는 종종 이곳 나주시장통에까지 내려오셔서 나주곰탕을 들곤 했답니다. 물론 나주곰탕 원조라는 ‘노안집’에서. 더욱 흥미있는 얘기는 서울에서 아주 특별한 손님이 내려오실 경우, 일부러 나주에까지 모시고 내려와서 나주곰탕을 대접했다는 것입니다. 광주에도 그 많은, 그 좋은, 내 노라 하는 음식점들이 많았지만 말입니다.
노안집은 지금도 문을 열어 문전성시를 이룹니다. 3대째 이어지고 있군요. 오랜만에 일행과 그 집을 찾아들어가 보니, 아 글쎄 옛날 그 할머니가 건강한 모습 그대로 일하고 있는 거 아니겠어요. 가마솥에 곤자소니(소의 창자 끝에 달린 기름기가 많은 부위), 도가니(무릎뼈), 아롱사태, 곱창, 양지머리를 넣어 푹 곤 다음, 무?파?마늘?소금?간장?깨소금?후추가루를 뿌려 만든 곰탕! 20년 전만 하더라도 벌겋게 이글거리는 장작불로 고았는데 지금은 세월이 세월인지라 가스불로 요리합니다.
금성관·나주향교 순례
‘전라도’라는 말은 전주의 전, 나주의 나 첫 글자를 따서 만든 것이다. 조선왕조(태조이성계)의 탯줄이랄 수 있는 전주와 고려왕조(2대혜종)의 외가인 나주는 그만큼 비중을 가진 곳임을 지리적 작명에서부터 증명한다. 반남의 고분군이 보여주듯이 영산강 유역에 막강한 세력을 펼친 나주는 삼한시대 적엔 마한의 불미지국이었다가 백제에선 발라군, 통일신라에서는 금성군으로 개명된다.
‘전라도’라는 말은 전주의 전, 나주의 나 첫 글자를 따서 만든 것이다
$pos="C";$title="";$txt="나주향교로 담장과 처마선의 아름다움에 자주 눈길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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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나주는 고려 성종 때에 ‘목(牧)’으로 승격, 12목 중의 하나가 된다. 그런 연유로 오늘날도 나주는 천년고도 ‘목사골’로서의 위상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조선시대에는 20개의 목을 두었는데 전라도 경우 나주, 제주, 광주, 능주 등 4목을 둔다. 목은 지방행정조직의 큰 단위이며 정3품의 목사를 두어 부속된 여러 고을을 관리토록 하였던 것이다.
매일시장 언덕길에 위치한 ‘원조곰탕집’에서 나온 나는 일행과 함께 곧바로 금계동 한복판에 위치한 금성관으로 향한다. 위로 머리를 들어 바라보니 나주관아의 정문인 ‘정수루’가 눈에 들어온다. 2층 목조건물로 축조된 이 건물의 한 가운데는 큰 북이 매달려 있다‘ 이 북은 읍성의 문을 여닫는 시간을 알리기도 하였다 한다.
금성관은 고려전기부터 있었으며 사신들의 숙소로 쓰였다
$pos="C";$title="";$txt="옛 위용을 되찾아가는 금성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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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관(나주시 시도유형문화재 제2호)은 조선 성종 때 나주목사 이유인이 세운 것이다. 나주목의 객사인 이 건물은 고려전기부터 있었으며 사신들의 숙소로 쓰였다. 조선시대에는 객사에 위패를 모시고 정월 초하루와 보름에는 서울궁궐을 향해 망궐례를 올렸다고 한다. 금성관은 목사내아(관사)와 함께 나주의 대표적인 고건축으로 기품과 위엄이 엿보인다.
여덟팔자(八) 모양을 한 팔작지붕은 위로는 하늘을 받들고 아래로는 땅의 힘을 제어하여 안정감을 주려는 듯 전통건축의 위풍을 중후하게 보여준다. 1592년 임란의병장 김천일 장군은 바로 이곳 금성관에서 의병을 모아 출병식을 가졌다. 해마다 10월23일에 열리는 ‘영산강축제’의 주 무대도 이곳이다.
나주는 1천년간 ‘목사골’로 존재하여 타지역보다 유림문화가 각별하다. 일반 백성들의 경우 궁전, 사전의 소작인으로 전락하여 궁핍한 생활을 계속하지만 한편으로는 근왕사상이 강하게 살아있었던 고을이다. 나주향교가 우선 그렇다. 규모에 있어서도 서울향교 다음이다. 제사의 공간인 대성전과 교육의 공간인 명륜당 건물이 3백년, 500년 수령을 자랑하는 노거수에 둘러싸여 목사골의 정취를 더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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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향교의 특징은 대성전과 명륜당의 앞뒤 위치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원래 유교에서는 ‘충효열 정신’에 입각하여 대성전의 위치를 높은 곳에 둔다.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원칙에 따라 공간배치를 할 때 앞쪽에 명륜당을 두고 뒤쪽에 대성전을 두게 한다. 그런데 현재 우리들이 보는 나주향교의 공간배치는 전묘후학(前廟後學)의 형태이다. 대성전이 앞에 있고 명륜당이 뒤에 위치해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불변의 원칙보다는 지혜를 좇는 공간배치인 것 같다
$pos="C";$title="";$txt="고풍스런 나주향교, 살짝 엿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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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을 알아본즉 현재의 나주향교 터전이 ‘평지’이기 때문에 대성전이 뒤에 있으면 안 보일 것 같아 앞에다 세웠다는 것이다. 불변의 원칙보다는 지혜를 좇는 공간배치인 것 같다. 나주향교는 규모와 보존상태에 있어서 타지역 향교를 능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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