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TTNG '헬로캐디'
[대구=아시아경제 장희준 기자] 스코틀랜드의 작가이자 골퍼였던 잭 매컬러프는 1892년 자신의 소설 ‘2000년의 골프’에서 캐디백을 실은 기계가 자동으로 골퍼들을 따라다니는 모습을 그렸다. 허리띠에 달린 전자장비가 기계를 유도할 것이라는 ‘상상’이었다.
130년이 지난 지금 그의 상상은 ‘현실’이 됐다. 예상보다는 20여년 늦었지만 대신 그보다는 더 세련된 모습이다. 골퍼가 별도의 장비를 착용하지 않아도 ‘알아서 깔끔하고 정확하고 센스있게’ 라운딩을 보조한다. TTNG가 개발한 로봇카트 ‘헬로캐디(Hello Caddy)’다.
버튼 누르니 '졸졸'…"코스 지도와 공략법까지"
8일 기자가 마주한 첫 인상은 그저 모양이 잘 빠진 핸드 카트다. 그러나 허리 높이쯤 자리 잡은 패널 위 버튼을 누르는 순간 절로 "오!" 하는 탄성이 나온다. 카트는 조금의 버벅거림도 없이 부드러운 주행 감각을 뽐내며 움직인다. 기자가 걸음의 방향을 꺾자 카트 역시 기자를 따라 회전하며 따라온다. 제원상 등반 능력은 최대 15도. 필드 위에선 웬만한 경사는 거뜬하게 오르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디로 가든 한 걸음 뒤엔 로봇이 있었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영화 ‘아이, 로봇’ 속 인공지능(AI) 비키를 마주하는 듯했다. 소리도 말쑥하다. 거슬리는 기계음 대신 전기차에서 날 법한 ‘우주선 소리’가 난다. 최신 기술로, 오직 나를 위한 서비스를 받고 있다는 기분은 라운딩을 한껏 즐겁게 만들어줄 요소다. 안전도 챙겼다. 주행 방면에서 좌우 120도 내에 이용자와 로봇 사이를 방해하는 장애물이 인식되면 곧장 ‘삐빅’ 소리를 내며 멈춘다.
올봄 라운딩에서 헬로캐디의 시연을 지켜본 미국 톱골프(Topgolf) 측 관계자는 헬로캐디에 대해 "진정한 골프, 미래의 골프를 즐기는 것 같다"는 찬사를 내놓기도 했다. 톱골프는 최근 캘러웨이가 20억달러(약 2조7510억원)에 사들인 스포츠 엔터테인먼트 업체다. 몇몇 미국 골프 매거진에서도 헬로캐디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그저 골프를 할 뿐인데 골프의 미래를 보고 있는 느낌"이라고.
"필드에서 미래를 만나다" 핵심 기술은 '라이다'
이 로봇은 높이 86㎝, 폭 72㎝, 전장 100㎝의 부담스럽지 않은 체구를 가졌다. 골퍼의 걸음을 따라 필드를 이동하며 필요한 핵심 정보도 제공한다. 전용 디바이스에선 코스 정보부터 현 위치, 팀간 안전거리, 호출 등 다채로운 기능을 사용할 수 있다.
무엇보다 로봇이 ‘캐디’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건 이용자를 얼마나 잘 따라갈 수 있는지다. 헬로캐디는 뛰어난 추적주행 기술을 보여준다.
핵심 기술은 라이다(LiDAR) 센서다. 어디서 들어본 듯하다면, 맞다. 차량의 자율주행을 지원하는 그 기술이다. 카트에 장착된 센서는 골퍼와 약 1m 거리를 일정하게 유지하며 따른다. 개발 초기엔 무선주파수(RF·Radio Frequency) 방식으로 연구가 진행됐다. 그러나 안정성과 상용화 측면에서 한계에 부딪혔다. 개발 방향을 바꾸기까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라이다 센서가 채택된 덕분에 별도의 장비를 착용하지 않고도 서비스를 누릴 수 있게 됐다.
이 밖에도 헬로캐디에는 다양한 첨단 기술들이 탑재됐다. 딥러닝 학습 기반의 영상인식 기술부터 모션 방향제어 기술, 위치기반서비스(GPS)를 활용한 캐디 서비스도 갖췄다. 방수 기능을 갖춰 비 오는 날에도 끄떡없다. 무게는 30㎏, 최대 속력은 시속 9㎞다. 멀게는 25㎞까지 10시간 동안 운행할 수 있고, 모터는 듀얼 BLDC(350W)를 장착했다. 가격은 400만원대 초반, 골프장 측에서 공유 모델로 구비하기엔 크게 부담스럽지 않은 수준이다.
로봇캐디, '골프 대중화' 이끄는 새로운 선택지
매력은 편리한 데서 끝나지 않는다. 골프 대중화의 가장 큰 걸림돌로 꼽히는 ‘비싼 이용료’의 대안이 될 수 있다. 국내 골프 인구는 지난해 기준 564만명, 인구 10명 가운데 1명꼴로 골프를 친다는 뜻이다. 문제는 비용이다. 지난해 골퍼들이 지출한 캐디피만 따져도 1조5934억원에 달한다. 반면 헬로캐디 대여료는 대당 3만원. 골퍼들의 부담을 덜어줄 선택지다.
캐디의 일자리를 뺏는 것 아니냐는 반론도 있다. 다만 TTNG 측은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하는 게 아니라 지원하기 위한 것"이라는 개발 취지를 강조한다. 일손이 모자라거나 혹은 사람이 서비스를 제공하기 어려운 환경, 캐디가 기피하는 시간대에 로봇캐디가 이를 해결해 줄 선택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2020년 11월 경북 경주시 코오롱가든 골프장에 첫 납품을 한 헬로캐디는 최근 1000대에 달하는 미국 수출 계약까지 완료했다. 올 6월 기준 전국 골프장 10여곳에 납품된 수량은 350대가 넘는다. 일부 골프장은 전면 도입까지 했다. 수도권에선 시범 운영에 들어간 경기 여주시 블루헤런 골프클럽(회원제), 제주에선 로봇캐디 도입으로 9홀 셀프 라운드를 시행 중인 아덴힐CC(대중제)가 대표적이다.
중견기업 샐러리맨에서 '로봇 파파'가 된 남자
130년 전 소설을 현실로 이끌어 낸 이야기의 주인공은 이배희 TTNG 대표(51·사진)다. 2001년 처음 골프를 접했으니 구력은 20년이 넘는다. 다만 로봇캐디 개발에 뛰어든 뒤에는 자주 라운딩에 나서지 못하다 보니 실력은 ‘보기 플레이어’ 수준이다. 12명의 직원을 이끄는 그는 ‘누구나 편리하게 골프를 즐기는 미래’라는 비전을 실현하는 리더다.
대구 달서구의 한 지식산업센터 4층에 자리 잡은 TTNG 사무실에서 이 대표를 만났다. 입구부터 거대한 벽처럼 쌓인 박스들이 반겨준다. 미국 수출을 앞두고 완제품 테스트까지 마친 헬로캐디였다. 2014년 설립된 TTNG의 첫해 매출액은 1000만원에 그쳤다고 한다. 작년 들어서는 14억원까지 뛰었다. 불안한 국제 정세로 인한 부품 수급 문제가 해결되면 최대 40억원까지 바라본다는 게 이 대표의 목표다.
이 대표는 원래 중견기업에 다니는 ‘샐러리맨’이었다. 안정적인 삶을 포기하고 모험에 나선 것은 그만큼 골프가 좋아서였다. 계란으로 바위를 깬 그의 좌우명은 ‘될 때까지’다. 이 대표는 "확신은 있었지만, 사업은 기술을 축적하고 여러 사람도 만나야 하는 만큼 마냥 쉽진 않았다"며 "지칠 때마다 현대그룹 창업주 고(故) 정주영 회장이 울산 앞바다 사진을 들고 다니며 조선소 자본을 끌어모은 이야기를 되뇌며 포기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반대 무릅쓰고 달려온 7년…美 수출까지 '쾌거'
이 대표는 대학 시절 관광학을 전공하고 2010년 대구대 골프산업학과에서 골프전문가 과정을 수료했다. 골프를 좋아할 뿐 기술전문가는 아니었던 셈이다. 홀로 로봇 개발에 뛰어든 그를 향한 주변의 우려 섞인 시선도 컸다. 하지만 전문 엔지니어가 아닌 만큼 이 대표는 오롯이 골퍼의 입장에서 생각했다. 거추장스러운 장비를 착용해야 하는 RF 방식 대신 라이다 센서로 개발 방향을 전환한 것 역시 그런 고민이 담긴 선택이었다.
그는 상용화를 위해 두 가지를 가장 고심했다고 한다. ‘누가 어떻게’와 ‘얼마나 쉽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해서다. 이 대표는 "로봇을 개인이 구비하기엔 부담스러우니 골프장에서 공유 모델로 배치할 법한 조건을 찾았다"며 "냉장고에 비유하자면 ‘가정용’의 형태로 ‘업소용’ 수준의 스펙을 갖춘 모델을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남녀노소, 전 계층이 찾는 골프장에서 누구나 쉽게 빌리고 조작할 수 있도록 사용자 인터페이스(UI)를 단순 명료하게 만들었다.
이 대표는 "캐디는 물론 스포츠 분야 서비스업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이 쉴 때 일을 해야 하는 어려움을 안고 있다"며 "그간 축적해온 기술을 바탕으로 누구나 손쉽게 골프를 즐기는 것은 물론, 여러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는 로봇제품들을 개발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장희준 기자 jun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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